[편집국칼럼] 하서 선생이 목놓아 울던 통곡단에 오르다!
[편집국칼럼] 하서 선생이 목놓아 울던 통곡단에 오르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0.12.28 10:1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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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겨울 문턱에 황룡면 야산 자락에 있는 난산(卵山)을 찾아 오른다. 난산에 있는 통곡단을 찾아서다.

산 언덕에 이르자 칼바람이 댓잎에 부딪히는 소리가 귓전을 스친다. 대숲을 지나 돌계단을 올라 노송 사이를 헤집고 나니 야산 정상부에 사각형의 석단이 있다. 한 사람이 앉으면 될만한 작은 크기다. 돌이끼가 검게 내려앉아 있다. 아무런 표식도, 그 의미를 기리는 해석도 없다.

다만 그 20여 미터 아래 통곡단의 유래와 의미를 설명해 놓은 ‘난산비’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41호로 지정돼있다. 본래 의미를 담은 통곡단은 세월의 바람 속에 묻혀있는데 그 통곡단의 의미를 설명해 놓은, 1843년 세워진 비문만 문화재로 지정된, 본말전도의 현장이다.

통곡단은 하서 김인후 선생(1510~1560)이 인종의 승하일인 음력 7월 1일을 기해 매년 하루종일 통곡했다는 현장이다.

충신은 불사이군이라 했던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절의(節義)를 고수하며 세상 밖에 나가기를 거부했던 하서의 비분강개가 서려있는 곳이다.

장성에서 태어난 하서는 33살에 홍문관 박사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5살 연하인 세자의 스승이 된다. 당시 중종이 전국의 석학 가운데 가장 훌륭한 사람을 스승으로 뽑아 세자를 성군으로 가르치고자 했는데 하서가 발탁된 것이다. 세자 역시 불과 5살 어린 나이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하서를 가장 믿음직한 스승이자 친구로 여기며 따랐다.

그러던 세자가 중종의 서거에 따라 조선 12대 왕인 인종으로 등극하여 이제 새로운 시대의 서막을 열려고 할 때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돌연 8개월 3일만에 의문사로 세상을 떠나게 되니 그 심정이 어떠했겠는가?

하서는 새 임금의 가장 두터운 신망을 얻는 신하이자 스승으로서, 누가 봐도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자리인 영의정의 0순위 주인공으로서, 미래 조선에서 천대받던 호남 인재를 등용하고 호남의 부흥을 꿈꿨을 수도 있다.

그런데 그 부푼 꿈이 일순간에 허망한 꿈으로 날라갔으니...

역사는 인종을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의 왕으로 기록하고 있다. 재임기간이 짧아 교과서에 등장하지도 않는다. 왕조실록에도 중종 편에 부록처럼 수록돼있다. 하지만 세자시절 아버지 중종의 부름으로 5세 때부터 29세까지 24년 동안, 누구보다 길고 엄격한 군주 수업을 받은 성군의 자질을 갖춘 왕으로 보고 있다.

이런 임금이 갑작스레 사망하자 하서는 낙향하여 매년 여름에서 가을로 바뀔 무렵이면 글을 접고 손님도 만나지 않고 우울한 기분으로 날을 보내며 문밖을 걸어 나가지 않았다.

하서는 인종의 기일인 음력 7월 초하루가 되면 술을 가지고 집 앞 난산(卵山)에 들어가 곡을 하고 슬피 울부짖으며 밤을 지새고 내려오기를 평생 한 번도 거르지 않았다.

인종의 뒤를 이은 명종은 수 차례 벼슬을 제수하며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오지 않자 명종이 전라도 감사에게 특명을 내려 “병이 낫거든 역마를 타고 오라”고 분부해도 사양 글을 올려 나가지 않았다.

하서는 인종을 애도하는 처절한 심정으로 <유소사(有所思)>란 글을 남겼다.

“임의 나이 삼십을 바라볼 때

내 나이 서른하고도 여섯이었소

신혼의 단꿈 반도 못 누렸는데

시위 떠난 화살처럼 떠나간 님아

내마음 돌이라 구를 수도 없네

세상사 모든 것이 동으로 흘러 가는데

한창 해로할 임 잃어버리고

눈어둡고 이 빠지고 머리 희었네...”

인종에 대한 애틋함과 현실에 대한 분노와 좌절이 비유적으로 녹아있는 글이다.

어지러운 세상이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틀리지 않는 듯하다.

그놈의 권좌, 권력을 둘러싼 쟁투가 하루도 그칠 날이 없으니...

장성 통곡단에 오늘도 하서 선생의 격한 통곡이 매섭게 귓전을 스친다. /편집국장 백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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