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 최현웅 기자
  • 승인 2018.05.01 09:3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강릉 유 씨 집성촌 들어와 이장 맡은 ‘첫 외지인’


산세 좋고 공기 좋고 물 맑은 천혜의 풍광에 반해

사람 좋아하고 일 잘하는 40년 교육경력 전문가

북이면 오월2리 송산마을 기용위 이장

“집성촌이나 다름없는 이 마을에서 4년 남짓밖에 안 산 외지인이 이장이 됐다고 인근마을에서 화재가 됐어요.”

올 초 이장으로 선출돼 이제 4개월째를 맞는다는 송산마을 기용위 이장(68)은 본래 황룡면이 고향이다. 평생 교직생활만 하다 이곳 송산에 자리 잡은 지 어느덧 4년이 지나고 있다.

그야말로 그림 같은 풍경 속에 자연과 하나 되어 살다보니 세상 남부러울 거 하나 없는 듯 보이지만 기 이장이 처음부터 이곳에 정착해 사는 게 만만치만은 않았다고 한다.

기 이장에 따르면 퇴직 후 귀향해 정착할 곳을 찾아 고향 황룡 부근을 알아봤으나 매매가 어려워 고심하던 중 기 이장의 부인이 송산마을을 보고는 첫눈에 반해 계약하게 됐다고 한다. 그런데 아주 사소한 일에서부터 이웃과의 갈등을 빚었고 급기야는 법적분쟁으로 번져 재판정에 서는 일까지 발생했다고 한다. 결국 화해권고를 받고 마무리 되었으나 이웃 간 겪었을 마음의 상처는 깊었으리라.

공직생활을 할 때도 무슨 일이든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일처리로 정평이 났던 기 이장으로선 온 마을이 가족과 같았던 이 마을을 처음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한다. “마을에 처음 왔을 땐 마을 여자들은 발언권은커녕 마을 회의에 나오지도 않았어요. 나중에 제가 이장을 맡고 나서 부부동반해서 나오지 않으면 회의할 수 없다고 하자 그때서야 나오기 시작했다”고한다. 그만큼 보수적이었던 송산마을에 기 이장은 지금 새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학창시절 초등학교를 빼고는 줄곧 광주에서 다녔던 기 이장은 중·고교시절 내내 황룡에서 광주까지 한 시간여 거리를 걸어서 통학할 정도로 부지런 하다. 그 시절 새벽 5시에 등교를 할 정도로 부지런하기도 둘째라면 서럽다고.

꼼꼼한 일처리, 막걸리도 좋아해

하루하루 마을일 대소사를 정리해 이장일지를 작성하는가 하면 마을의 새로운 규약을 만들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끊임없이 모색한다. 또 그동안 정리되지 못했던 마을 공동 재산인 마을회관등과 같은 공동재산과 주민들의 부동산들도 깔끔하게 정리해 모두 등기처리 했다. 경로당 식사도 하루 두 끼 이상 차리던 것을 식사를 차리는 사람의 수고를 덜기 위해 한번으로 줄이는 등 합리적인 대안과 방안들을 찾기 위해 오늘도 동분서주한다.

‘더불어 살고 싶다.’는 기 이장은 “정 많고 순박한 주민들 덕분에 이 마을에 더욱 애착이 간다.”며 지난 명절엔 토하를 직접 잡아 담가 마을 주민들에게 일일이 나눠주는 등 나눌게 생기면 언제든 아낌없이 베풀며 살았다고 한다.

원체 사람들을 좋아해 지금도 교직 생활 중 맺은 인연으로 제자와 동료, 선·후배 등 1년이면 수 천여 명의 손님들이 수시로 찾아와 문전성시를 이룬다는 기 이장네 문턱은 지금도 이미 닳도록 닿아있다.

“세상사 모든 문제와 갈등의 원인은 결국 사람과의 관계라 내가 먼저 베풀고 나누면 해결 안 될 문제가 없다.”며 대인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기 이장은 막걸리도 좋아한단다. 취재를 끝내고 나오는 취재진에게 삼겹살 구워 놓을 테니 언제든 시간날 때 막걸리 한잔 하러 오란다.

마을 곳곳에 산재한 고인돌 유적. 옛시절 고인돌의 역사적 가치를 몰랐던 주민들이 집을 지을 때 구들장 등의 용도로 가져가 사용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마을 곳곳에 산재한 고인돌 유적. 옛시절 고인돌의 역사적 가치를 몰랐던 주민들이 집을 지을 때 구들장 등의 용도로 가져가 사용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마을 곳곳 고인돌 유적

송산마을은 500여 년 전 강릉 유 씨로서 진원현령을 지낸 劉世王分의 아들 弼이 북일면에서 이거해와 14~15대에 걸쳐 자작일촌하며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마을은 ‘송산’과 ‘필동’ 두 개의 마을이 합해 이루어진 마을이다. ‘송산(松山)’은 옛날 마을 주변에 소나무가 우거져 ‘솔뫼’라 불렀으며 한자 로 ‘松山’이라 했다고 한다. 마을 곳곳에는 연대를 알 수 없는 고인돌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아주 오래전부터 주민들이 주거해 온 유서 깊은 마을임을 짐작케 한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소중한 유산이 관리할 주체가 없어 심하게 훼손 되거나 방치돼 있어 보전방안이 시급한 실정이다. 지난시절 이 고인돌의 역사적 가치를 모르는 마을주민들이 집을 지을 때 구들장 등의 용도로 가져가 사용하는 등 수난을 겪었다고 한다.

이 뿐 아니라 마을 앞 입구에 세워진 300여년이상 지난 느티나무며 500여 년의 역사를 함께한 갈참나무 등 유·무형의 값진 유산들을 간직한 마을이다.

‘문희공 유창’ 배향 사우 ‘송계서원’

마을 입구에 자리한 송계서원은 1492년(성종 23)에 진원현감을 지낸 유세분(劉世玢)의 주도 하에 조선조 개국공신이자 문학으로 이름이 높았던 문희공(文僖公) 유창(劉敞, ?∼1421)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사우(祠宇)로 1492년에 강릉 유 씨 시조인 유창을 배향하기 위해 북일면 성덕리 사동마을에 사당으로 창건되었다. 1545년(인종 1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여 서원으로 중건했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소실되었다가 1798년(정조 22년)에 재건하였다. 1868년(고종 5년)에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24년에 복원됐다.

강릉 유 씨의 시조인 유창은 1371년(공민왕 20) 문과에 급제하였고 1392년 조선 개국을 도와준 공으로 2등인 협찬(協贊) 개국공신이 되었다. 후에 대사성, 승녕부윤(承寧府尹)을 거쳐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1416년(태조 16)에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에 봉해졌다.

1950년에 문숙공(文肅公) 유사눌(柳思訥, 1375∼1440), 은재(隱齋) 유한량(劉漢良), 술재(述齋) 유덕문(劉德文), 천방(天放) 유호인(劉好仁) 등 4인을 추향(追享)하였다. 서원 내에 옥천부원군 유허비와 송계서원 묘정비가 있다. 향사일은 음력 3월 15일이다. 사원은 내삼문과 담장으로 둘러져 있으며 강당인 강우재는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이다.

'문희공 유창' 배향하기 위해 1492년 창건된 사우 송계서원 전경
'문희공 유창' 배향하기 위해 1492년 창건된 사우 송계서원 전경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