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까 하실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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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현웅 기자
  • 승인 2018.05.08 13:4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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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찾고 싶은 생태체험마을로"
남면 마령 1리 이정신 이장
내마마을 마을회관 드디어 착공
내마에서는 18년만에 처음 맡는 이장
남면 마령1리 이정신 이장이 구상중인 새0ㅇ태마을 입구인 청양산 등산로를 가리키고 있다.
남면 마령1리 이정신 이장이 구상중인 생태마을 입구인 청양산 등산로를 가리키고 있다.

 

올해는 드디어 내마마을에도 마을회관이 생긴다. 그동안 내마마을 주민들은 마을회관이 없어 거의 700미터가량이나 떨어진 서촌마을까지 가야 하거나 아니면 마을 위쪽에 임시로 마련된 간이 컨테이너 박스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마령 1리지만 아랫마을 서촌과는 주민 수나 마을 규모가 작다. 그러다 보니 윗마을 내마는 모든 혜택에서 항상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그동안 마령 1리 이장은 아랫마을 서촌에서 나왔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다 올해 내마마을에서 첫 이장이 나왔다. 18년만 이라고 한다. 이정신(48세) 이장은 지난해까지 내마마을 영농회장이었는데 가끔 볼일을 보러 광주나 장성을 들를 때면 그때마다 내마마을 어르신들과 서촌마을 어르신들을 태워다 주곤 했는데 어르신들이 그것을 잊지 않고 자꾸만 이장 출마를 하라고 해서 등 떠밀려 이장에 출마하게 됐다는 이 이장.

이장이 되고 나서 제일 먼저 마을 어르신들에게 달려가 마을회관 건립 동의서 도장부터 받으러 다녔다. 마을 주민 모두가 원하는 일이지만 적은 돈이나마 돈 들어가는 일에 선뜻 도장을 내어주기란 쉽지 않은 법. 어찌어찌해서 동의를 받았다. 군에서 지원금과 마을 경비 등을 마련해 드디어 이달 중순이면 첫 삽을 뜨게 된다.

이 이장의 고향은 원래 북하면이라고 한다. 학교를 마치고 광주며 경상도 등지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중 젊은 시절부터 어렴풋이 품었던 과수농사에 대한 전업농의 꿈을 실현해 보고 싶어 어머님을 모시고 아버님 산소가 있는 이곳 마을에 온 지가 벌써 8년이 돼 간다고.

삽자루는 군대 이후 처음 만져

언뜻 보기에도 하얀 피부에 매끄런 손을 가지고 있어 어느 누가 보더라도 농사를 지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이 이장은 태어나 군대에서 삽자루 쥔 거 빼고는 이 마을에 와서 처음으로 삽질을 해봤다고 한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처음 접한 생소한 일들이라 실수도 많이 하고 하나에서 열까지 어찌 대처해야 할지 답답하기만 했었습니다. 하다못해 농기계 하나 사려해도 어디서 사야 할지도 몰랐었으니까요.”라며 당시의 고충을 얘기했다. 그래도 그때마다 마을 어르신들의 도움이 있어 그때의 시름을 많이 덜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에 올 때 당시 면장도 귀농을 한다니까 극구 말렸었다고 한다. 이 이장 역시도 지금 귀농하려는 사람들이 있다면 말리고 싶다고 한다. 그만큼 귀농에 대해 신중히 검토하고 많은 준비과정을 거쳐야 후회가 없다고 조언한다.

이어 “말라보이긴 해도 제가 한번 하고자 하는 일은 반드시 하고야 마는 성격이라 오기도 생기더라고요.”며 그때를 회상하며 “이제는 정착해 마을에 대한 애착도 생기고 과수농업에 대한 자부심도 많아져 후회는 결코 하지 않는다.”는 이 이장은 해마다 감 값이 떨어져 아쉽기는 하지만 남면의 감은 전국 어디에 내놔도 결코 품질이 뒤지지 않아 브랜드화 할 수만 있다면 충분히 경쟁력 있는 상품이 될 것이라는 자신감을 내비친다.

한편 이 이장은 마을 위쪽 청량산 등산로와 내마마을을 관통하는 내를 개발해 이곳 내마마을을 생태체험마을로 가꾸어 가는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지금도 이 마을 논엔 우렁이농법으로 키운 우렁이를 사냥하러 날아오는 백로들이 떼를 지어 수십 마리가 모여들어 장관을 펼치고 있다.

기삼연 의병장 주둔지 서촌

서촌마을은 원래 남이면 지역으로 700여 년 전에 형성됐다고 전해진다. 자풍과 한 마을이었는데 한일합방 후 토지 세부 측량을 하면서 법정리 경계가 독배 기둥 능선으로 되어 있어 서쪽 일부가 분리되어 마령리로 편입되면서 서촌이라 했다.

구한말에 약 40호가 살았는데 기삼연 의병부대가 자풍과 본 마을에 주둔하고 있었다. 의병이 이 지역을 주둔지로 택한 것은 이 지역이 의병의 본거지인 황룡면 수련산과 통행이 용이하면서도 광주를 공격하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다가 1908년에 일본군과 대접전이 벌어져 의병들이 쫓겨나가자 일본 경찰이 3호 만을 남기고 37호를 완전 소각시켰으며 소각 후 의·식·주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많이 겪었는데 그 당시 최재기 집에서 의·식을 마을 주민들에게 제공하기도 했다.

한일합방 후에도 40여 호로 최씨, 김씨, 오씨, 박씨, 조씨, 정씨 등이 주로 거주하였고 6.25때에는 30여 호 정도가 살았는데 인공 때 아녀자 2명이 살해당했으며, 3호가 군인가족이라는 이유로 재산 몰수를 당했고, 보도연맹에 관련됐던 오씨, 최씨 등 2명이 수복 후에 처형되었다. 일제 때부터 호수가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하여 현재 25호가 거주하고 있다. 마을 이름은 자풍에서 분리되어 나올 때 자풍의 서쪽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서촌이라 불렸다.

청송 심 씨 충효 정신 깃든 내마

내마마을은 마령리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로 600여 년 전에 청송 심 씨가 현 마을의 서편에 위치한 면학동에 처음 터를 잡았다고 하며 그 후 점차 아래로 내려와 현 위치에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전한다. 1789년(정조 13년)에 발간된 <호구총수>에는 <남이면>조에 내마량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1912년에 발간된 <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내마리로 기록되어 있는데 원마령 마을로 "마랭이"라고도 불렸다. 청량산이 말의 형국이라 보고 마을이 이산의 가까운 안쪽에 있기 때문에 내마라 하였다고 하며 바깥쪽에 있는 마을은 외마라 부른다.

일제 강점기에는 50호 정도 거주라던 마을로 청송 심 씨가 주로 살았으며 신평안 씨, 나주오 씨, 함안 주 씨 등이 거주했다. 6.25 동란 때에는 40여 호가 살았는데 인민군은 들어오지 않았으며 수복 후에 함안 주씨, 장흥 고씨, 청안이 씨 등 3명을 처형했다고 한다. 1970년대 급격한 이농 이후 주민 수가 급감하다 최근 들어 귀농 귀촌 인구의 증가로 주민수가 늘어가고 있다.

내마마을 위쪽엔 양계사가 자리하고 있다. 1834년(현종 1년)에 정안공 심덕부(1328~1401)와 그의 셋째 아들인 둔재 심계년(1368~1434), 손자인 애암 심연(1392~1425)의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 건립됐다. 1868년(고종 5년)에 대원군의 서원 훼철령에 따라 훼철되어 1906년(광무 10년)에 단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오다 1957년 복설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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