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 칼럼 - 인생삼락(人生三樂)이 따로 있을 손가?
편집국장 칼럼 - 인생삼락(人生三樂)이 따로 있을 손가?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1.10.12 11: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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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모 편집국장
백형모 편집국장

 

가을 하늘이 창공에 푸르르다.

가을빛이 저 하늘가에 머무는가 했더니 황룡강 꽃길에 내려앉았다.

황룡강은 지금 총총히 피어난 해바라기 꽃만큼 열린 마음들로 넘쳐난다.

백만송이 해바라기 꿈만큼...

그 꽃길 사이를 걷는 객들의 걸음걸음마다 즐거움이 가득하다.

꽃 자체로 아름다운데 꽃길을 내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울 것인가?

그 꽃길을 내고 가꾸어 온 장성 사람들의 마음에도 함박웃음과 넉넉함이 녹아난다.

받는 사람보다 베푸는 사람이 훨씬 즐거운 법이라고 했던가.

황룡강을 찾는 사람에게 즐거움을 선사하는 것은 황룡강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선인들은 그렇게 세상과 더불어 사는 즐거움을 락(樂)이라 했다. 어떤 상황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줄 아는 삶을 권한다.

‘인생삼락’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맹자의 삼락이다.

맹자는 인생에서 세 가지 즐거움을 다음과 같이 얘기했다.

첫째, 父母俱存兄弟無故(부모가 다 살아계시고 형제들이 무고한 것).

둘째, 仰不愧於天府不怍於人(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고 땅을 굽어보건대 사람들에게 죄를 짓지 않은 것).

셋째, 得天下英才而敎育(천하의 영재나 후학들을 얻어 가르치는 일).

맹자는 유학자답게 근엄한 즐거움을 선택했다. 세 가지를 누리는 인생은 더 없는 즐거움이리라. 하지만 이 세 가지를 다 취하지 못했다하여 불행한 것은 아니다. 부족함 속에서 즐거움을 찾아가는 삶이 행복일 수 있다. 모두를 채우지 못했어도, 단 한가지에서라도 즐거움을 느낄 줄 아는 것이 더 현명하다.

애당초 신은 한 인간에게 끝없는 행복 또는 끝없는 불행만을 주도록 설계하지 않았다. 불행만 끝없이 계속되는 삶은 없다. 무한할 것 같은 행복 끝에 멈춤도 있고, 불행도 찾아온다. 하나에서 열까지 세는 동안 무수한 변수들이 섞이는 게 인생이다.

조선시대 4대 선비의 한 분으로 꼽히는 상촌 신흠(1566-1628) 선생도 삼락을 얘기했다.

첫째, 문을 닫으면 마음에 드는 책을 읽고,

둘째, 문을 열면 마음에 드는 손님을 맞으며,

셋째, 문을 나서면 산천경개를 찾아 가는 것이었다.

상촌이 살았던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불우한 시대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섬나라로부터 피폐한 나라 꼴의 끝을 보았으며 병자호란으로 북쪽 오랑케에게 굴욕의 역사를 체험했다. 내부로부터는 광해군의 폭압정치와 이괄의 난 등 민란과 권력을 둘러싼 권모술수를 뼈아프게 느낀 시기였다. 그런 슬픈 시대의 유산처럼 상촌은 산천경개를 찾아나서기를 세 번째 항목으로 권하고 있다.

추사체라는 명필로 유명세를 떨친 추사 김정희(1786-1856)도 삼락을 말했다.

첫째는 독(讀)이니 마음에 드는 책을 읽는 것이요,

둘째는 색(色)이니 사랑하는 사람과 변함없이 애정을 나누는 것이며,

셋째는 주(酒)로서 벗을 청하여 술잔을 나누며 풍류를 즐기는 것이라고 했다.

추사는 잘나가던 왕가의 외척 출신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참판 등의 벼슬을 지내고 학문과 서예에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사람이다. 24세에 청나라에 건너가 대학자와 고승들과 교유하면서 ‘해동제일의 유학자’란 칭찬을 받았고 우리 문화에 자부심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권력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말년에 고금도와 제주도에 귀양을 갈 정도로 불운한 삶을 보냈다. 선인들의 삶을 뒤돌아보면 아무리 잘 나가는 위인일 지라도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될 때가 있음을 일러준다.

그래서인지 추사 선생은 주와 색을 즐거움의 하나로 지목했다. 마음에 드는 벗을 청하여 흉금을 터놓고 술잔을 기울이는 것, 게다가 사랑하는 사람과 운우를 나누는 것을 삼락의 중심으로 꼽았다.

즐거움은 느끼기에 달렸다. 세상이 불행의 요소들로 가득하다고 느끼면 불행할 뿐이다. 또 지천에 널린 인연과 삼라만상이 나의 행복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행복할 수 밖에 없다.

황룡강변에 피안의 꽃들이 널렸다.

모두 나를 위한 꽃들이다.

하지만 꽃이 존재하기까지 누군가의 노고가 있었으리라.

꽃 한 송이에 그 땀방울 하나하나에 영글었음을 되새긴다.

황룡강에 내린 가을 꽃길이 그지없이 황홀하다.

선인들의 삼락이 따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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