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인데, 선생님 묘비명은 준비해 두셨습니까
겨울인데, 선생님 묘비명은 준비해 두셨습니까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1.11.15 10:1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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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아들 녀석이 유치원에 다녀오겠다고 하길레 입에 뽀뽀를 해 주었는데 저녁에 돌아오는 아들 녀석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시간의 힘이 느껴지는 한마디다.

아차하니 순간에 세월이 바뀐다.

이제 가을인가 싶더니 벌써 겨울로 접어든다.

수확을 마친 대지도 두터운 옷으로 갈아입는다.

해질무렵인가.

땅거미가 드리운다.

이때 쯤 해서 뭔가 준비해둘 것이 있지 않을까?

그 ‘이때 쯤’이라고 해서 특별한 나이를 말한 것이 아니다. 40~50대나 60~70대에게 공통으로 해당되는 준비물이다. 어쩌면 오히려 젊은이들이 현명한 미래를 위해 더 절실히 필요한 것일 수도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자 해답이기도 한 그것은 바로 ‘묘비명’이다.

누구든 가야할 저쪽 끝 숙명의 길이 바로 노년이며 마침표일진데, 그 길의 끝에서 자신을 말해줄 근사한 이정표 하나 남겨야 하지 않겠는가.

방송인 김미화씨가 코미디 인생 30년을 담은 자서전 에세이집을 펴내면서 책 제목을 ‘웃기고 자빠졌네’라고 하고 이 제목을 자신의 묘비명으로 새겨달라고 말해 감동을 준 적이 있다. ‘웃음을 선사하며 평생을 살다 갔노라’는 식으로 근엄하게 표현해 봤자 코미디언 김미화를 더 알아줄 것도 아니라는 설명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생전에 묘비명을 남긴 것이 관례가 많지 않아 명문장이 별로 없지만 외국에선 미리 준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내 인생,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다”라고 새긴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

아일랜드의 극작가 겸 소설가인 버나드 쇼는 1925년 노벨문학상까지 수상하며 명작을 남기고명예를 누릴 만큼 누리며 95세까지 살았다. 임종을 앞둔 날, 본인이 직접 남긴 말을 묘비에 새겨 달라 했는데 거기에 그렇게 새겼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버나드 쇼가 남긴 묘비명의 뜻은 “우물쭈물하지 말고 해야할 일, 하고 싶은 일이면 무엇이든지 당장 하라, 당차게 그 목표를 향하여 걸어가라”는 뜻이다. 조건이나 단서를 달며 망설이지 말고 행동에 옮기라는 주문이다.

“좀 시간이 나면...”

“좀 더 여유가 생기면...”

많은 사람들이 이런 저런 이유로 행동에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과연 그날은 언제일까.

어쩌면 영원히 오지 않은 채 어느날 훌쩍 생을 마감할 수 있다.

오늘의 행복한 삶을 먼 미래로 미루고 그날을 기다리면서 하루하루를 덧없이 살다가 버나드 쇼의 묘비명처럼 ‘우물쭈물’ 될 수도 있다.

“그 때 공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조금만 운이 더 따라 주었더라면...”

“한 10년만 젊었더라면...”

수 없는 주문을 입에 달고 다니면서 과거를 남 탓으로 돌리며 한숨만 짓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10년 전에 잘못된 일에 대해 핑계를 찾을 줄만 알지 지금 씨앗을 뿌려 다음 10년 뒤에 수확할 생각은 않는다.

10년 미래로 돌아가서 10년 전을 생각하면 그날이 지금이다. 10년 뒤에 후회 안 하려면 지금 머뭇거리지 않아야 한다.

‘언제 한번 뵙죠, 언제 한번 식사나 하죠’라던 사람과는 결코 식사를 못한다는 것을 잘 알지 않는가. 단언컨데 ‘언제 한번’이란 기회는 자신이 지금 찾아 나서지 않으면 스스로 찾아오지도 않을 시간이다.

천상병 시인은 묘비명에 이렇게 새겼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세상 소풍이 끝나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인생은 나그네 길손의 소풍이다. 소풍을 즐겁게 만드는 것은 자신의 몫이다. 그 소풍이 끝나는 날 조금이라도 덜 후회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러기 위해 이름 석자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인정할 그럴싸한 묘비명 하나 준비해야 한다.

중광 스님은 “괜히 왔다 간다”고 묘비명을 새겼다.

두고두고 곱씹어 보고 싶은 묘비명이다.

망설이다간 다 지나간다. 정말로 괜히 왔다가는 인생이 아니길 기원한다.

 

/백형모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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