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政治에 道는 있는가...썩은 言路에 사약으로 대신한 조광조에 묻는다.
[편집국 칼럼] 政治에 道는 있는가...썩은 言路에 사약으로 대신한 조광조에 묻는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2.02.14 10: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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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최고의 개혁주의자 관료였으나 임금의 사약을 받고 이슬로 사라진 사간원 조광조, 그리고 훗날 조광조를 처형하는데 앞장섰던 영의정 남곤.

젊은 시절이던 어느 날, 조광조와 남곤이 길을 가는데 아리따운 여인이 옆을 지나갔다. 조광조는 뒤돌아서서 그 여인을 다시 한 번 쳐다보았다. 하지만 남곤은 옆으로 고개를 돌리지도 않았다. 조광조는 남곤의 모습에서 수양이 부족한 자신을 되돌아보며 한탄하고 부끄러워했다. 조광조는 어머니 여흥 민 씨에게 이 사실을 털어놓았다. 어머니는 통찰력이 대단했다.

“젊은 남자가 목석이 아닌 바에야 아리따운 여인을 보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부끄러운 행동이 아니다. 차차 학문을 익히고 수양을 쌓으며 철이 들게 되면 분별이 생기게 된다. 오히려 남곤의 행동이 젊은 남자답지 못하다 할 수 있다. 겉으로는 수양을 닦은 사람처럼 보이지만 속으론 분명 냉철한 성품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남곤이 나중에 정치를 하게 되면 인정사정없이 행동할 것이다. 누구나 실수는 있으며 이 또한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용서할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하는 것이 윗사람의 그릇인데 그는 그러지 못할 것이다. 너는 앞으로는 남곤을 가까이 하지 말라.”

어머니는 젊은 시절 행동 한 가지를 보고 열 가지를 생각했다. 어머니의 예감은 적중했다.

남곤(1471~1527)은 문장도 훌륭하고 글도 잘 써 1494년 별시문과에 급제한 뒤 중종 1년(1506년) 관료들이 반역을 꽤하고 있다고 무고하여 가선대부가 됐으며 그 뒤에도 승진과 좌천을 거듭해 황해도관찰사, 전라도관찰사, 호조참판, 대사헌 등을 역임했다. 중종 14년에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 등의 신진사림파를 숙청하여 좌의정, 영의정에 올랐다. 그러다가 말년에 죄를 자책하고 화를 입을 것을 걱정하여 평생 써놓았던 글과 서적을 모두 불태웠다. 죽은 뒤에 문경이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나 곧 이어진 명종 때 사림파가 되살아나자 또다시 탄핵을 당해 관직을 삭탈 당한다.

그렇다면 조광조는 어떠했을까?

조광조(1482~1519)는 29세인 1510년 진사시에 2등으로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간다. 조광조의 학문과 인품은 성균관 유생 중에서도 단연 발군이었다. 당시 성균관의 추천을 받아 관리로 발탁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조광조가 추천을 받는다. 성균관 유생 200여 명은 만장일치로 조광조를 추천하지만 그의 관리 등용은 좌절된다. 특히 사간원 이언호는 “조광조는 학문이 뛰어나 지금 관리로 등용된다면 오히려 그의 학문의 깊이가 완성되지 못할 것입니다. 아직 젊은 나이이니 더욱 학문에 정진해 훗날 국가의 인재로 쓰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라고 명분을 내세워 반대했다.

그러자 조광조는 과거를 통해 정식으로 관직에 입문하겠다고 결심, 왕이 시행하는 알성시 문과를 본다. 이 때 조광조는 중종과 인상적인 첫 대면을 하게 된다.

중종은 “지금과 같은 어려운 시기에 어떻게 하면 공자의 사상이 녹아있는 이상적인 국가를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질문을 던진다. 조광조는 “임금은 진심으로 백성을 감화시키는 정책을 펴야 하고, 대신을 믿고 조정의 신료들과 함께 국사를 처리하면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임금이 스스로 덕치로 나라를 다스리고 먼저 솔선수범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알성시에서 한치도 흩어짐 없는 답안지를 받아든 중종은 조광조라는 이름 석 자를 또렷이 기억하게 된다. 조광조는 발탁과 동시에 왕과 관료들의 정치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논박을 하는 사간원을 맡게 된다. 조광조는 임명된 지 이틀 뒤 파격적인 상소를 올려 정국의 핵으로 급부상한다. 상소는 ‘나를 파직하던가 아니면 (그 동안 비뚫어진) 사간원, 사헌부의 모든 대간을 파직하십시요’라는 폭탄 발언이었다. 신하나 백성이 임금에게 의견을 올릴 수 있는 언로(言路)가 확보되지 않으면 곧 나라가 썩게 된다고 보았다.

하지만 조정의 공신세력 척결을 주장하고 정치개혁을 몰아붙이던 소신은 남곤 일파로부터 “조광조가 왕이 될 모반을 꾸미고 있다”는 ‘주초위왕(走肖爲王)’ 모함에 의해 옥에 갇힘으로써 처참히 무너진다.

“전하, 신이 다른 사람과 뜻이 어긋나도 오로지 임금만 믿고 정책을 시행했습니다. 전하께서 친히 심문하시면 만 번을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입니다.”

조광조가 감옥에서 상소를 올려 중종과 면담을 신청했으나 중종은 오히려 화순으로 유배를 보내고 끝내 사약을 내린다.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한 조광조는 절명시(絶命詩) 한 수를 남기고 조선의 개혁을 내려놓는다.

“임금을 어버이 같이 사랑하고 나라 걱정을 내 집같이 하였도다. 밝고 밝은 햇빛이 세상을 굽어보고 있으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훤하게 비춰 주리라.”

유배지인 화순군 능주면 남정리 유허비에는 그의 미완의 개혁의지가 쟁쟁하게 귀를 울린다. 오직 백성과 나라의 안위를 생각하며 바른말과 개혁을 서슴지 않으며 사약을 감수하던 조광조가 고개를 들고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

선비의 기백은 사라지고 상대의 결점과 빈틈 찾기에만 급급한 오늘날의 정치 풍토에 대해 600년 전 조광조에게 길을 묻는다.

목하(目下) 정치의 바른길은 어디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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