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홍길동전의 허균...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다 능지처참 당하다
[편집국 칼럼] 홍길동전의 허균...새로운 세상을 갈망하다 능지처참 당하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2.06.20 10:4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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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절이 수상하면 과거의 사건이 대비되기 마련이다.

장성의 실존 인물 홍길동전을 지었던 조선의 천재 문장가 교산 허균(1569~1618)이 시대에 대비된다.

그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조선을 구해준 명나라를 사대하기 위해 꼭 필요했던 외교 엘리트였으며 조선의 박학다식한 지식인, 20대 초반에 그의 모작시가 나돌 정도의 천재 시인이다.

조선을 대표하는 사신으로 중국에 6차례나 다녀왔다. 그렇지만 세상과 세상을 움직이는 무리들과 화합하지 못해 관직 생활 20여년 만에 세 번의 유배와 여섯 번의 파직을 당한다. 그리고 끝내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는 모반의 대역죄인으로 지목돼 능지처참을 당해 시신도 없이 사라지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당시에도 오늘날 삼심제처럼 사형을 집행하기 까지는 삼복계(三覆啟)가 있었으나 대신들의 잡단 상소에 따라 모반의 자백이 나온 지 3일 만에 변론의 기회조차 없이 일사천리로 사형을 집행했다.

그는 스스로를 불여세합(不如世合), 세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보았다.

허균은 왜 세상과 화합하지 못했을까? 그 천재성으로 능히 세상을 굽어볼 수도 있었을 터인데 말이다.

허균은 양반이 지배하고 체통과 체면이 중시되던 시대, 서자들이 사람 취급을 못 받던 사회에 개혁을 일으키고자 했다. 허균은 유교사회인 조선이 금기시했던 승려들과도 허물없이 지내고, 서자출신들의 지식인들과 깊은 교감을 나눴다. 또 부임지에 갈 때는 서울의 기녀들을 데리고 가서 그 행적을 글로 남기는 등 자유분방한 삶을 살았다.

조선을 지배하던 주자학 사상의 절대 진리를 인정하지 않고 진리는 상대적이라는 자각을 깨닫기 시작했다. 더 넓은 세계로의 시야를 갈구했다.

1614년과 1615년 두 차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중국에 천주교를 전파한 마테오리치와 명리학의 대가 이탁오를 만나면서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고 전통을 부정하는 급진적 학문을 추구한다. 이 무렵 북경에 다녀오면서 무려 은 1만 냥 어치의 책 4천권을 사온다.

당시 조선에서 관리들을 명에 사신을 파견할 때 여비를 주는 대신 인삼을 파는 특권을 주어 경비를 조달하게 했는데 대부분이 골동품이나 비단 등을 사 오던 다른 관리들의 행태와 완전히 다른, 지식 탐구적 행보를 보였다.

한번은 공주 목사로 부임하자마자 편지를 보내 서얼 친구들을 관아로 불러들인다.

”녹봉의 절반을 덜어서 그대를 부양하고자 하네, 그대는 재주가 나보다 열배는 뛰어나지만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음은 나보다 더 심하네. 빨리 와주길 바라네. 자네가 와서 내가 비방 받는다 해도 개의치 않겠네“

조선의 모순을 일찍부터 실감한 허균은 세상의 비난을 무릅쓰고 열린 세상을 향하고자 사상의 문을 열었다.

허균이 함열에 유배 보내졌을 때 쓴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란 책이 있다. 장독대를 덮을 만한 하찮은 글이라는 뜻의 이 책은 시, 수필, 편지 등이 실려 있다. 이 책의 마지막에 있는 유재론(遺才論)이라는 논설에는 조선의 신분제 비판과 그의 개혁사상을 엿보게 한다.

“나라를 다스리려면 인재가 있어야 한다. 우리나라는 나라가 작아서 인재가 드물다. 그런데도 대대로 진압에서 벼슬하던 집안이 아니면 높은 아무리 능력 있는 사람이라도 벼슬에 오를 수 없다. 한 사람의 재주와 능력은 하늘이 준 것임으로 귀한 집 자식이라고 재능을 많이 준 것도 아니며 천한 집 자식이라고 해서 인색하게 주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는 신분과 귀천에 관계없이 고르게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허균의 사상과 행동을 조선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었다.

새로운 사회를 갈망한 소설 홍길동전. 실록에서는 도적으로 기록돼 있는 홍길동이라는 서얼 출신이 이상 국가를 건설하는 이 소설에는 그의 개혁 사상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허균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민중에게 있다는 호민론(豪民論)을 펴면서 ‘세상에서 가장 두려운 존재는 임금이 아니라 백성’이라고 했다.

“임금이 백성을 위하지 않고 자기 욕심이나 채운 나라가 망한 것은 당연하다. 나라를 훌륭히 다스리는 임금의 굳은 의지와 결단에서 나올 뿐이다.”

비롯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는 비운을 맞았지만 신분 차별 없는 사회, 능력 있는 백성들이 그 뜻을 펴고 살 수 있는 사회를 지향하며 조정과 왕에 대해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허균이 진정으로 바랐던 것 낮은 곳으로부터의 평등, 차별 없는 자유로운 세상이었다. 백성을 으뜸으로 삼은 개혁 사상, 호민을 꿈꿨던 세상을 그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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