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권력은 무엇일까?
[편집국 칼럼] 권력은 무엇일까?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2.07.25 10: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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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전 대통령이 고향으로 돌아간 양산 사저에 악을 쓰는 극렬분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고 있다. 잠시 하다 말겠거니 생각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더 강도가 높아간다. 사저 주위는 물론, 마을 초입부터 줄을 서서 설친다. 거칠게 설치면 설칠수록 영웅시 되고, 그런 극단적 동영상을 퍼트려 구독자를 늘리며 돈벌이에 큰 도움을 준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다. 전직 대통령이 자택 안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얼마나 씁쓸할까. 당사자는 그만두고 주민들은 무슨 죄란 말인가.

불과 두달 전까지만 해도 한국의 심장부이자 권력의 정점인 청와대에서 한반도와 오천만 인구를 굽어 살피던 지존 아니었던가.

지는 해의 서러움, 물러가는 권력의 뒷모습을 보여주는 생생한 드라마다.

지는 해가 있으면 뜨는 해도 있는 법. 한 손으로 승전기를 치켜들고 펄럭이며 용상에 앉아 위엄있는 포스로 노려보는 영화의 한 장면이 클로즈업 된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 뉴스에는 윤석열 대통령이 출근길에 기자들과 분주히 현안에 대해 질문을 주고 받고, 곧 이어 그 내용들이 TV화면에 전달된다.

도대체 권력이 무엇이길래 이토록 극과 극의 차이로 대별되는가.

사전적 의미에서 권력이란, 상대방으로 하여금 원치 않은 행동을 강제하는 능력이라고 풀이된다. 쉽게 말하면, 남을 내 말에 따르게 하는 것이다. 좋게 말하면 내 뜻을 펼칠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이다.

권력은 그 미묘한 맛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한 번쯤 뜻을 세워보기도 하고 과감히 도전장을 내밀기도 한다. 그러나 승률은 10~20%에 불과하다. 한 선거에 보통 10명이 꿈을 꾸다가 5명이 선거에 출마하고 1명이 당선되는 게 관례다. 패배자를 훨씬 많이 만드는 게 선거다. 이 선거병은 한번 걸리면 영원히 헤어나오질 못하는 특수성이 있다. 때문에 명예와 재산을 함께 잃고 가문이 통째로 망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권력의 정의는 관점에 따라 아주 다양하다.

버트란트 러셀: “권력이란 의도한 결과의 생산”

로버트 달: “결과의 가능성을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

막스 베버: “자기 의사를 관철시킬 수 있는 모든 가능성”

한스 모겐소: “다른 사람의 마음과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포장된 말은 틀리지만 내용은 한 가지로 해석된다. 종합하면, 권력은 나의 의사를 상대에게 전달하여 강제하거나 나의 뜻대로 세상을 변화시키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권력의 영향은 비단 정치 영역에 한정돼 있지 않다. 현실에서는 권력이 없는 곳을 찾기 힘들 정도로 모든 일상에 스며들어 있다. 모든 게 정치의 단계이자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가까이는 직장에서 사용주와 노동자, 상사와 부하, 가정에서 부모와 자식의 위치와 역할에서도 권력의 위용이 드러난다.

권력은 사람과 사람사이의 관계가 이루어진 애초부터 필요악이었다. 권력의 발생 시기도 태고적 고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떤 역사학자는 인류가 집단을 이룬 그 시작부터 정치가 있었다고 말한다. 인류 역사 자체는 권력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권력에 관한 어록들을 살펴보면 그 속성을 알게 한다.

마오쩌둥은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라고 했다. 수억의 인민군을 통솔하며 권력을 쟁취한 그의 출현 배경과 딱 맞는 표현이다.

“권력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 남용은 더욱 위험해 진다”는 에드먼드 바크의 말이나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달버그 액튼의 말, “권력의 증가는 재화의 증가를 낳는다”는 영국 시인 쿠퍼의 명언, “무제한의 권력은 지배자를 타락시킨다”는 영국 정치가 피트의 말은 남용되는 권력을 경계하는 교훈들이다.

권력의 운용방법에 대해서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이론이 압권이다.

“항상 선하려고 애쓰는 자는 선하지 않은 많은 사람들 틈에서 반드시 파멸하게 되어 있다. 그러므로 권력을 지키고자 하는 군주는 선하지 않게 되는 법을 배워야 하며, 그렇게 배운 바를 필요에 따라서 이용하거나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무시무시한 권력의 진단이다. 마키아벨리는 선한 정치를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교훈을 주고 있다.

그 이론의 실습장이 문재인 대통령의 양산 고향이다.

전직 대통령을 이렇게 혹독한 환경에 방치한데 대해, 현 정부가 대책마련 지시는 그만두고라도 쥐꼬리만한 미안함도 없는 이유가 군주론의 비정함에서 나온 것 같다.

군주론에서 군주는 영원한 대상이지만 한국에서는 불과 5년짜리 군주라는 점을 잊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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