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가 있는 집〉 장성 대창동 ‘한국식당’
〈역사가 있는 집〉 장성 대창동 ‘한국식당’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2.08.02 12: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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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장면집에도 ‘더불어사는’ 철학과역사가 있다!

40년 전통의 장성읍 대창동 ‘한국식당’ 김종상·임임숙 부부

시원한 콩물국수 한 그릇에 6,000원. 장성에서 가장 저렴한 음식 가격을 고집하는 대중음식점이 있다. 장성읍 대창1동 926번지 한국식당( 별칭 한국반점)이다. 장성 토박이라면 한국식당을모를 리 없다고 단언한다.

옛날 한국식당 이전에 이 자리에는 ‘한국라사’라는 양복점이 있었다. 한 때,장성 지역 학생들 교복의 70%를 이 집에서 맞춰 납품했을 정도니 유명세를 탔다. 웬만한 중국집에서 콩물국수 한 그릇이 8-9천 원이지만 ‘이만하면 돼지 뭘 더~’라고 생각하는 집이다.

“남들이 가격을 올려야 할 것 아니냐고 말하지만 아직 생각이 없습니다. 짜장면이나 콩물국수는 서민의 대명사 아닙니까? 너도나도 함께 올리면 어쩌겠습니까?" 괴짜 사장으로 불리는 김종상(76)씨와 임임숙(69)부부의 짜장면 집 경영철학을 대변해주고 있다.

파는 사람보다 먹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그 자리에서만 40년을 넘겼다. 김사장은 오토바이 배달의 원조로도 불린다. 키도 작아서 오토바이에 올라타면 전형적인 배달원 모습이다. 김 사장은 ‘먹고 살 정도만 되면 사회와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경영철학을 간직한 사람이다.

지난 2월 장성중앙초등학교에 낡은 신발에 허름한 잠바를 걸친 할아버지가 찾아왔다. 걸인인가 의심하고 있는데 갑자기 250만원을 내 놓으며 모교 장학금 기부의사를 밝혔다. 행색이 초라하여 반신반의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반점’ 사장이었다. 사연을 들은 교장은 감동한 나머지 한국반점에서 감사의 회식을 베풀며 그 높은 뜻을 기리기도 했다.

평범치 않는 김 사장의 기구한 운명은 시대적 소산이었다.

김 사장이 4살 때, 6.25가 발발하자 서울 장충동에서 양복점을 하던 선친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부유했던 집안 덕분에 장성에서 유일한 성모유치원을 다녔고 중앙초를 거쳐 광주로 유학을 가서 서중·일고를 정통코스로 졸업했다. 하지만 대학까지는 험난한 길이었다. 그래서 학업을 포기하고 스무살에 돈을 벌기로 작정, 장성에서 연탄공장을 차렸다.

하지만 1년 만에 다시 양복점으로 방향을 돌려 양복은 물론 청바지, 학생 교복 등에 손을 댔다. 종업원이 20명이나 됐을 정도였다. 여동생은 바로 옆에 양장점을 열어 성업을 이뤘다. 대창동에서 장사가 가장 잘되는 가게로 소문났다.

그러다가 80년대 초에 교복자율화와 기성복 시대가 도래하자 시대의 변화를 감지, 양복점을 접고 그 자리에 한국식당이란 음식점을 차린 게 오늘에 이르게 된 사연이다. 한식과 중식을 겸했는데 특히 추어탕, 백반은 오랜 단골로 이어졌다. 이런 세월이 벌써 40년이다.

이 식당은 이름이 두 개다. 위 상호에는 한국반점’, 출입문에는 ‘한국식당’으로 적혀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출입문에 허름한 모양으로 붙은 비빔밥, 육개장, 찜뽕, 짜장 등의 옛날식 메뉴는 한국식당의 역사를 말해준다. 옛날부터 그랬는데 바꾼다고 얼마나 달라지겠느냐는 것이다.

“이 자리를 쭉 지키면서 이제 지내온 세월도 돌아보고, 여유롭게 살려고 합니다. 돈 좀 생기면 또 다른데 기부도 더해볼 심산입니다”

예전부터 틈나면 고아원도 찾아다니고 사회단체에 물품을 기탁하는 등 남모르는 선행을 베풀어온 김 사장은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란 말을 실감하듯 말년 운이 잘 풀려

평생을 뜻대로 하지 못했던 한국식당 주변 땅 92평을 올해 초 등기이전 했다.

김종상이란 한자 이름으로 (쇠북 종鐵 기쁠 상燦) 자를 쓴 사람은 세상에 유일할 것이라는 김 사장은 40여 년 동안 한결같이 즐거움으로 사는 짜장면집 아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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