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 최현웅 기자
  • 승인 2018.05.29 16: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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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 자란 그 태 자리 ‘항상 그리웠다’
번듯하게 자란 두 딸, 아내에게 항상 고마워
마을 화합과 발전 위해 아직도 할 일 많아
북일면 북부 마을 기숙도 이장
북부마을 기숙도 이장
북부마을 기숙도 이장

“젊었을 적에 못 가본 곳이 없을 정도로 하도 돌아다녀서 그런지 몰라도 언젠가는 고향에 돌아가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었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도 집이며 논밭은 팔지 않고 있었어요.”

건설업계에 종사하며 국내는 물론 인도네시아와 사우디아라비아 등 해외 등지를 돌아다니느라 가정을 돌볼 겨를조차 없었다는 북일면 신흥리 북부마을(만세·북부) 기숙도 이장(77)과 인터뷰를 진행하던 날은 마침 기 이장의 생일날이었다.

북부마을 내에서도 비교적 넉넉했던 가세 탓에 기 이장은 젊은 시절 20대 초반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집안의 도움으로 사업을 시작해 많은 돈도 벌었지만 ‘쉽게 얻은 재물은 그만큼 쉽게 나가는 게 세상의 이치였을까? 놀기 좋아하고 술 좋아하는 기 이장에게 젊음과 사치의 유혹은 결코 떨쳐버리기 힘든 것이었으리라. 버는 만큼 써버리고 탕진해버리기 일쑤였다고. 당시 부모님들이 집에서 내놓은 자식 취급할 정도로 부모님의 속을 많이 썩여 드렸다며 후회막급하다고 회상한다.

그래서인지 자신과 닮은 자식 안 낳겠다며 자녀 출산도 미루었다. 아들이 하나쯤 있었으면 좋겠지만 잦은 출장과 장기간의 해외 출장에도 바르고 곱게 자라준 두 딸을 보면 한편으론 안쓰럽기도 하고 또 대견하기도 하다고. 기 이장은 그러면서 한마디 던진다. “딸들이 잔정이 많아요. 키워보면 아실 거예요.” 이 날도 멀리 대전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큰딸이 아버님 생신상 차리느라 부리나케 달려와 케이크이며 떡을 사 왔다.

수령 300년이 지난 장성군 보호수 184호 느티나무앞에선 기숙도 이장
수령 300년이 지난 장성군 보호수 184호 느티나무앞에선 기숙도 이장

자녀교육 아내 덕 커

기 이장은 두 딸들이 이만큼 번듯하게 성장해온 배경에는 아내의 말없는 뒷바라지가 컸다며 아내에 대한 감사와 마음을 꼭 전하고 싶다고 했다. 집에 있는 시간보다 현장일이 바빴던 기 이장이 믿을 수 있었고 안심하며 일에 매달릴 수 있었던 건 모두 아내 덕분이었다고. 또한 아내의 확고한 교육철학으로 이렇게 훌륭한 딸들을 키워낼 수 있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기 이장은 오랜 객지 생활을 하면서도 항상 가슴속엔 고향을 품고 살았다고 한다. 자신이 나고 자라온 그 집과 논밭을 찾아 다시 온 때가 12년 전쯤이었다고. 도시생활만 하다가 농사지으려니 힘들지 않았냐는 질문에 고향이라 그런지 적응하는데 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이장을 하게 된 계기를 묻자 “처음 이 마을에 왔을 땐 주민들 간 화합이 잘 되지 않아 크고 작은 분란도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 기 이장의 아버님을 기억하고 있는 마을 주민들이 기 이장 아버님의 인품이면 기 이장도 잘 해내겠다 싶었다며 추천이 들어와 맡게 된 게 벌써 8년이 지났다고 한다.

무엇보다 주민화합과 마을발전이 최우선이라는 기 이장은 이장을 뽑는 시기만 되면 마을 사람들이 서로 남남이 되고 적대시하는 모습을 보고 이러한 폐단은 반드시 고쳐야겠다고 맘먹고 주민들의 동의를 거쳐 이장 투표를 없애고 마을 주민들끼리 회의를 거쳐 지명하고 동의하여 임명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지금도 일부 주민은 불만도 있겠지만 기 이장이 맡기 전과는 천지차이라고 한다.

우리 나이로 100세가량 되셨다는 장모님을 이 마을에 모셔와 가끔 찾아뵙기도 하고 보살피고 있다는 기 이장은 취재진에게 던지듯 당부한다. “여자들 말은 한마디도 틀린 것 없어요. 여자 말만 잘 들으면 바르게 잘 살아요.”

마을뒷산에서 내려다 본 신흥마을 전경
마을뒷산에서 내려다 본 신흥마을 전경

만 세대가 살 넉넉한 터라 ‘만세마을’

신흥리는 장성읍에서 북서쪽으로 12km 거리에 있으며 성미산 남쪽 능선의 서쪽 기슭 해발 70m에 위치한 서향 마을로써 산기슭은 만세, 도로변은 북부이다. 북쪽으로 박산리 오복촌과 인접하고 만세마을 뒤로 호남고속도로가 통과하며 남쪽은 남부와 한 마을처럼 붙어있다. 서쪽은 경지 정리된 넓은 신흥리 들판이 조성되어 있고 들 가운데로 개천이 지나며 장성-고창 간 지방도(898)가 북부 마을 앞을 통과하고 있다.

만세(萬歲)마을은 원래 만세(萬世)로 썼으며 만세대수가 살터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북부(北部)마을은 면사무소의 북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북부라 했다고 한다. 이 마을은 장사추와(長蛇追蛙)의 형국으로 산 9번지 반남 박씨 선산의 지형이 마치 긴 뱀이 개구리를 쫓는 형국처럼 생겼다고 한다.

이 마을엔 면사무소 뒤쪽에 수령 300년이 넘는 느티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군 보호수 184호로 지정돼 있으며 높이 18m, 둘레 3.1m 정도의 크기다. 지금은 볼 수 없지만 일제 강점기 이전까지는 ‘만세탑’이라는 5층 석탑이 탑거리(탑배미)에 세워져 있었는데 일제 때 일본인이 약탈해 가져갔다고 한다. 이곳의 지명이 오산현이었을 당시 이곳에 죄인을 가두는 옥이 있었는데 오산현이 옮겨간 뒤 그 자리에 죄인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탑을 세웠었다고 한다.

또 도로변 마을 중앙에는 오산노인회창립기념비가 있는데 이 비는 1970년 변을봉이 주축이 돼 6.25 사변으로 가족이나 재산을 잃고 의지할 곳 없는 60세 이상의 노인들의 모임인 오산 노인회를 창립하고 세운 비석이 있다.

마을앞 도로변에 세워진 오산노인회창립기념비
마을앞 도로변에 세워진 오산노인회창립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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