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김한종 군수에게 직간(直諫)할 충신은 얼마나 있을까?
[편집국 칼럼] 김한종 군수에게 직간(直諫)할 충신은 얼마나 있을까?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2.10.24 11: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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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역사에서 전설의 황제인 요순 임금을 제외하고 최고 태평성대기를 당나라 2대 황제인 당 태종 이세민의 치세 기간을 꼽는다. 이 시기를 ‘정관의 치’라고 부르는데 당시 정치의 모든 것이 ‘정관정요’라는 책에 상세히 담겨있다.

이 ‘정관정요’에서 태종은 정치를 이렇게 정의했다.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엎을 수도 있다. (君舟人水 水能載舟 亦能覆舟)”

그런데 이세민은 어떤 정치를 폈으며 어떤 신하들을 뒀기에 이렇게 성군이 됐을까?

수나라 말기에 태어난 이세민은 아버지를 도와 당나라를 세우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그리고 아버지를 당 초대 황제로 모셨다. 문제는 이세민이 둘째 아들이라는 점이다.

이 때 당나라 신하로 위징(魏徵 580~643)이란 인물이 있었다. 위징은 자질을 인정받아 황태자인 큰 아들 이건성의 측근이 됐다.

위징은 이건성에게 훗날 안위를 위해 동생인 이세민을 제거해야 한다고 여러 번 권유했다. 그러나 이건성은 망설이다가 결국 동생에게 황제 자리를 빼앗기고 끝내 죽임을 당했다. 이세민은 황제가 된 얼마 후 위징이 형을 황제로 삼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제는 위징을 불러 물었다.

“어째서 네놈은 우리 형제 사이를 이간질하고 날 죽이려 했던 것이냐?”

그러자 위징은 당당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만일 황태자께서 소신의 말을 들었더라면 황제가 되어 오늘과 같은 비극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대신들은 위징이 죽음을 자청하고 있다며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러나 황제는 도리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었다. 위징의 흔들림 없는 소신과 정직을 높이 산 황제는 그를 간의대부(諫議大夫:황제의 잘못을 고치도록 간하는 벼슬)로 임명했다.

그러면서 물었다. “군주가 어떻게 하면 훌륭한 명군이 되고 어찌하면 어리석은 암군이 되는가?” 위징이 망설임 없이 답했다. “겸청즉명 편신즉암(兼聽則明 偏信則暗), 여러 의견을 들으면 현명한 군주가 되고 한쪽 말만 들으면 아둔한 군주가 됩니다”

직간을 서슴지 않은 위징은 황제에게 300 차례의 직언을 했으며 어느 날은 하루에 4번을 직언하기도 했다고 정관정요에 기록돼 있다. 얼마나 지긋지긋하게 간언했으면 “저놈을 당장 잡아다가 처형하라”고 명을 내리기를 수십 번이었으나 황제는 위징이 근위병에 이끌려 처형대에 오르기 직전에 “멈춰라”를 수없이 반복했다.

한번은 태종이 천하를 평정하고 민생을 어느 정도 안정시킨 뒤, 위세를 만천하에 고하기 위해 태산에 올라 봉선제(封禪제)를 지내려고 했다. 봉선제는 진시황이 하늘에 천자임을 알리기 위해 시작한 최고의 천제 의식이었다.

태종이 신하들에게 묻는다.

“내가 봉선제를 올리려고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 모든 신하들이 “이렇게 태평성대를 이루었으니 지당하신 일이옵니다”라고 이구동성으로 찬성했다.

그런데 유독 위징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노기가 달아오른 태종이 직접 묻는다.

“그대는 어떤 생각인가?”

“폐하 제 생각으로는 아직 아니옵니다”

“아니 어찌 그런다는 것이냐?”

“제 마음이 그럴 뿐입니다. 아마도 제 마음이 그렇다면 백성들의 마음도 그럴 것이옵니다”

좀 더 선정을 베푼 뒤에 할 일이지 벌써부터 하늘의 천자를 흉내 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었다. 그것은 황제에게 직간하는 간의대부라 하더라도 황제에게 대드는 정도가 아니라 모욕에 가까운 언사였다.

“이봐라, 이 자를 당장 옥에 가두고 내일 해 뜨기 전에 처형하라”

분노를 참지 못하던 태종은 위징을 처형하겠다고 선포한다. 그날 저녁 태종은 부인 장손황후의 정중한 문안 인사를 받는다. 장손황후는 현모양처로 알려졌다. 정장을 하고 신하의 예를 갖춘 장손황후가 말한다.

“폐하, 감축드리옵니다. 예부터 군명신직(君明臣直), 임금이 명군이면 신하가 직언을 하는 법입니다. 직언하는 신하를 둔 폐하야 말로 성군 이옵니다”

이 말을 들은 태종은 다시 한 번 위징을 용서하고 더욱 신뢰한다.

위징이 63세에 중병에 걸려 사망하자 태종은 비통해하며, 자신이 직접 묘비의 비문을 쓴다. 그러면서 조정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거울에 자신을 비춰보면 의관이 바른지를 알 수 있고, 역사를 거울로 삼으면 나라 흥망성쇠의 도리를 알 수 있으며, 사람을 거울로 삼으면 자신의 잘잘못을 알 수 있는 법이다. 위징이 죽었으니 나는 이제 거울을 잃어 버렸구나.”

‘직간하는 사람을 거울로 삼는다’는 뜻의 이인위경(以人爲鏡)은 이 고사에서 나왔다. 태종은 직간을 서슴지 않는 위징과 사리를 잘 분별하는 부인 등을 가까이 했기에 태평성대를 이룰 수 있었다.

민선 8기를 이끌고 있는 김한종 군수가 취임 100일을 맞아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 군수는 “지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비판도 있어야 한다. 사람은 각자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언제든지 언로를 열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경청하고 소통하겠다”고 밝혔다.

소신에 찬 발언으로 기대를 모은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잘못을 비판하는 언론과 직간하는 충신이 있어야 하고, 그 뜻을 헤아릴 줄 아는 지도자의 아량이 필요하다.

당 태종이 위징을 옆에 두고 ‘직간을 거울삼으며’ 최고의 성군이 되었던 것을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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