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늦기 전에 앞당겨야”
“희생자에 대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 늦기 전에 앞당겨야”
  • 최현웅 기자
  • 승인 2022.11.14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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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장성군 합동추모제 엄숙 거행

‘희생자에 대한 보상소멸시효 해제.진화위 조사연장’ 주장

 

7일 장성군민회관에서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를 위한 제 13회 장성유족회(회장 변동주. 87세) 합동추모제가 열렸다.

이날 추모제는 장성향교 전교 김영풍 수석부회장의 집례로 전통제례를 행한 후 강신-참신-독축-초헌-아헌-종헌의 순서로 치러졌다. 초헌관엔 변동주 유족회장, 아헌관엔 박상곤 감사, 종헌관엔 신극희 간사가 집전해 행사를 진행했다.

행사에는 이개호 국회의원과 김한종 군수를 대신해 김명신 부군수, 고재진 군의회의장 등이 참석했으며 고창옥 전국유족회 부회장과 홍기축 전남연합회 회장 등이 참여해 자리를 빛냈다.

변동주 회장은 인사말을 통해 “가신님의 명복을 빌며 다시는 이런 끔찍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국방을 튼튼히 하고 우리도 대비를 단단히 해야한다”고 말했다.

고창옥 전국유족회 부회장은 격려사를 통해 희생자에 대한 보상소멸시효 해제와 진화위 조사기간 연장, 기념일 제정, 재단설립 등 8가지 사안에 대한 필요성을 제기하고 “반쪽짜리 과거사법을 바로잡아 영령들의 명예회복과 진실규명을 이뤄내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유족들은 한국전쟁 전·후 100만 명에 이르는 민간인 희생사건의 진실규명과 명에 회복을 위한 ‘특별법 재·개정 전국 유적 서명’날인을 받고 있다.

<적대세력에 의한 희생>

변동주 유족회장
변동주 유족회장

 

“음력 팔월만 되면 그날의 아픔이...”

북상 지역 변동주 장성군유족회장...조부모, 부모, 형제 희생

장성군 북상지역(지금의 북이·북하면)에 살았던 변동주 장성유족회장은 아버지가 일제강점기 무렵 법원에 근무했었다. 6.25가 발발하고 인민군이 남쪽을 점령했을 때 변 씨 가족들은 몸을 숨기며 피신해 있었다.

인민군들이 마을에 도착하자 몇몇 인사들 외에는 연행하지 않아 변 회장 가족들은 그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각 마을에는 자생적으로 인민위원회가 꾸려지고 이들은 스스로 마을 치안과 행정을 맡기 시작했다. 그러다 몇 달 뒤 국군과 경찰이 마을에 들어오게 되었고 마을에 있던 인민위원회 사람들은 인근 야산으로 들어가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변 회장에 따르면 낮에는 국군과 경찰이 마을을 돌아다녔고 밤에는 인근인 방장산과 백암산 등지의 산에서 빨치산이 내려와 마을을 점령했다고 한다.

그러는 사이 전황이 불리해진 인민군들이 북쪽으로 퇴각하면서 빨치산들은 관청 일을 도왔거나 관청에 근무했던 사람들을 대상으로 색출 작업에 나섰다. 그러다 8월 어느 날 밤 깊은 단잠에 빠져있던 형제들을 다급히 깨우는 어머님의 목소리가 들렸고 변 씨는 앞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칠흑 같은 야밤을 뚫고 마을을 도망쳐 나왔다.

어머니의 지시대로 형제들이 각자 다른 길로 도망쳐 온 탓에 살아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날 밤 변 씨 가족 10명 중 할아버지 할머니, 부모와 고모, 큰형과 누이동생이 죽고 변 회장과 어린 동생 4명만 겨우 살아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당시 변 회장의 나이 15살이었다. 변 회장은 아직도 음력 8월만 돌아오면 그날의 트라우마로 잠을 못 이룬다.

<공권력에 의한 희생>

유족회 김규락
유족회 김규락

 

“고향은 내게 끔찍한 기억만 남겨줬어요”

북이면 김규락 씨...어머님 누이, 작은아버지 희생

1950년 당시 북이면에 살았던 김규락(79세)씨 집안도 동네 인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운 집안에서 부유하게 자랐다. 당시 작은아버님 2분 모두 전남도청과 군청에 근무했는데 해방 후 지식인들 대개 그랬듯 이들도 좌익 성향이 있었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9월 맥아더의 인천상륙이 시작되자 국군은 반격을 시작하고 인민군은 북쪽으로 퇴각하기 시작한다. 남쪽엔 군인과 경찰이 다시 마을을 점령하고 인민군 부역자 색출에 나서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날 김 씨 어머니가 고창장에서 장을 보고 오는데 국군이 집안에 들이닥치더니 아버지를 찾았다. 당시 아버지는 다른 곳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난데없는 난리를 접한 어머니는 사태 수습도 못하고 아이들을 들쳐업고 군인들을 피해 무작정 도망가갔으나 결국 어머니와 3살 여동생은 안타까운 죽음을 맞았다. 군인들이 찾던 2분의 작은아버님도 결국 돌아가셨다.

당시 김 씨 나이 7살이었다. 당시의 공포가 얼마나 극심했는지 김 씨가 아버지를 재회한 건 김 씨 나이 12살이 다 되었을 때였다. 그렇게 고향을 등지고 서울살이 한 지가 70여 년이 다 된다.

당시 고향에 묻혀있던 친척들과 조상의 묘도 전부 이장했다는 김 씨는 일 년에 딱 한번 있는 민간인 희생자를 위한 위령제에는 참석하고 있다.

김 씨는 “남들이 어릴 적 고향에 대한 얘기를 하며 추억에 잠긴다고 하지만 저에게 고향이란 끔찍한 기억밖에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어릴 적 그 고향이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념이 다르다고 서로 죽여야 되나? 통렬한 반성 있어야

변동주 회장과 김규락 씨는 동시대에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면서 6.25를 겪었다. 한쪽은 적대세력에 의해 가족이 희생됐고 또 한쪽은 공권력에 의해 가족을 잃었다. 전쟁과 이념의 대립은 이렇듯 무섭다.

김규락 씨는 “아침저녁으로 보는 텔레비전 뉴스를 볼 때마다 참담하고 안타까울 때가 많다.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싸우고 적대시하고 죽이기까지 한다. 그래선 안 된다. 전쟁이 무서운 건 전쟁 자체보다 생각이 다르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다. 제발 이제는 그러지 말자”라고 세태를 질타했다. 이어 “지역감정도 그렇고 세대간 갈등도 그렇다. 서로 다름을 인정할 줄 알아야 한다. 편가르기 말고 함께 나가야 한다”며 화합을 강조했다.

변 회장도 한 목소리로 말했다. “더 이상 이 나라에 이념대립으로 전쟁과 학살같은 끔찍한 일은 되풀이 되선 안된다”고.

 

“현대사 속 숨겨진 진실 반드시 밝혀내야”

2기 진화위, 호남 민간인 희생자 진실규명 결정

전쟁 전후 인구 영광 2만, 장성 1만 줄어들어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는 지난 1일 호남 지역의 군경, 지방 좌익 등에 의한 민간인 희생 사건 등 총 4건에 관해 진실규명 결정을 하고 관련 권고를 내놨다.

이중에는 영광군에서 발생한 민간인 희생자에 대한 조사가 포함됐다. 당시 희생자들은 대체로 국군의 불갑산 토벌 작전 시 희생된 양민으로 피난을 위해 입산한 일가족이 몰살 되는 등 피해를 입은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엄청난 피해를 준 장성군의 실상에 대해서는 아직 어떤 노력도 감지되고 있지 않다.

진화위 관계자는 “장성군은 당시 좌우익이 가장 치열했던 영광군과 접해있어 삼서와 삼계 지역에서 피해가 극심했고 북일·북이·북하지역은 공권력에 의한 민간인 집단 희생이 많았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한국전쟁유족회는 당시 민간인 학살 진상규명과 관련해 국회에서의 조속한 처리를 요구하고 있다.

유족회는 “전쟁이 끝난 지 7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많은 유족들이 자신의 부모, 형제들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 숨겨진 진실을 하루빨리 밝혀내 유족들의 응어리진 한을 풀어줘야 한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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