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창 백형모 칼럼] 이어령 교수의 "나에게 이야기하기"
[시대의 창 백형모 칼럼] 이어령 교수의 "나에게 이야기하기"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3.01.09 11: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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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서울올림픽을 떠올리면 사람들은 개막식의 하이라이트 장면을 잊지 못할 것이다.

화려한 군무의 단원들이 빠져 나간 뒤 아주 평화로운 정적의 푸른 초원에서 하얀 옷을 입은 어린이가 굴렁쇠를 굴리며 경기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모습 말이다.

그 어린이는 그로부터 7년 전, 독일의 바덴바덴에서 서울을 차기 올림픽 개최지로 선정한 날 태어난 이이였다. 계산해보면 그 아이도 지금은 42세가 된다.

그 개막식의 행사 제목은 ‘벽을 넘어서’라고 이름 붙여졌는데 전쟁 폐허의 분단국 한국을 상징하면서 세계의 평화와 화해의 마당을 열자는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호돌이 어린이’라 불리는 윤태웅 군이 운동장 끝에서 정적을 깨고 나타나 전통 굴렁쇠를 굴리며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명장면은 세계인을 감동시켰다.

이 기발한 아이디어를 내놓은 사람은 개·폐막식을 총괄한 이어령 교수(전 문화부장관, 1933~2022)였다. 지난해 2월 26일, 향년 88세로 문화계의 큰 별이 사라졌으니 벌써 1주기를 눈앞에 두고 있다.

이어령은 굴렁쇠 개막식을 기획한 이유에 대해 “문학 하는 사람이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묻자, “원고지에 쓰던 것을 잠실 주경기장으로 옮긴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문학적 참여주의자 정신을 보여주었다.

이어령은 1965년 남정현의 소설 <분지>가 공산주의를 찬미한 반미작품으로 낙인찍혀 재판을 받을 때 증인으로 출두하여 검사와 변호인으로부터 문답을 주고받는데 최고 지성을 발휘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다.

변호인:이 작품이 북한 공산집단의 주장에 동조했다고 공격을 받고 있는데?

이어령 : 그것은 달을 가리키라는데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격이다. 남씨가 가리키는 달은 주체적인 한국 문화이며 ‘어머니’로 상징되는 조국이다.

검사 : 나는 이 소설을 읽고 놀랐는데 증인은 용공적으로 보지 않았는가?

이어령 : 나는 놀라지 않았다. 병풍 속의 호랑이를 진짜 호랑이로 아는 사람은 놀라겠지만, 그것을 그림으로 아는 사람은 놀라지 않는다. <분지>는 소설이지 신문기사가 아니다.

이어령의 이 같은 지성은 재판부를 감동케 만들어 당시 박정희 정권의 서슬 퍼런 반공체제에서 검사의 징역 7년 구형을 물리치고 선고유예로 끝나는 파란을 낳았다.

굳이 반세기 전, 케케묵은 이야기를 꺼낸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다.

새해를 맞는 시점에 그의 시 한편이 사람들의 욕심을 향한 죽비의 두터운 울림으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1년 전 고인이 된 이어령이 우리들의 마음을 가리키고 있는데 보라는 달은 안 보고 손가락만 바라보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소망하며 그 시의 전문을 수록한다.

새해 마음가짐을 위한 기도문으로...

‘나에게 이야기하기’ -이어령-

너무 잘하려 하지 말라 하네.

이미 살고 있음이 이긴 것이므로~

너무 슬퍼하지 말라 하네.

삶은 슬픔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돌려주므로~

너무 고집부리지 말라 하네.

사람의 마음과 생각은 늘

변하는 것이므로~

너무 욕심부리지 말라 하네.

사람이 살아가는데 그다지

많은 것이 필요치 않으므로~

너무 연연해 하지 말라 하네.

죽을 것 같던 사람이 간 자리에

또 소중한 사람이 오므로~

너무 미안해 하지 말라 하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실수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므로~

너무 뒤돌아보지 말라 하네.

지나간 날보다 앞으로 살날이

더 의미 있으므로~

너무 받으려 하지 말라 하네.

살다보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기쁘므로~

너무 조급해 하지 말라 하네.

천천히 가도 얼마든지

먼저 도착할 수 있으므로~

죽도록 온 존재로

사랑하라 하네.

우리가 세상에 온 이유는

사랑하기 위함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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