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장성 정신을 찾아 [1] 오천 김경수
[기획연재] 장성 정신을 찾아 [1] 오천 김경수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3.03.20 14: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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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정신의 표상...그 서릿발 같은 어록을 찾아서[1]
장성 남문창의 주인공 오천 김경수 선생의 발자취
의기로운 기상을 한껏 내뿜고 있는 장성군 북이면 호남오산남문창의비각.
의기로운 기상을 한껏 내뿜고 있는 장성군 북이면 호남오산남문창의비각.

 

-글을 시작하며-

무엇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어 불의를 보면 못 참게 만드는가.

심중에 어떤 영이 섰을 때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고 불의에 맞서게 되는 것인가.

굴곡진 역사의 반전에는 언제나 마음을 바로잡은 정의의 사도들이 있어 역사가 더 이상 퇴보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장성의 인물들이 그랬었다.

조선 역사에서 장성 사람들이 드러내 보인 의로운 기는 어떻게 발하여 어디로 통하였는가.

역사적 흔적과 사료에 나타난 장성인의 의기열전을 통쾌하게 드러내 보이는 어록들을 되짚어 장성얼의 표상이 되도록 하고자 한다./ 편집자 주

장성 기상의 징표 ‘호남 남문창의비’

두 아들을 의병으로 불러낸 명 문장

“호남 50 고을에 의기 있는 남아가 어찌 없으리까”

임진왜란이란 전대미문의 국난을 당하여 남문창의를 일으켜 자신은 물론 두 아들을 전장으로 끌어들여 순국케 한 오천 김경수(1543~1621) 선생의 발자국을 먼저 찾아간다.

장성 창의정신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남문창의비각기(南門倡義碑閣記)는 호남인의 기상과 장성인의 정체성을 대변하는 명문장이다.

장성정신이 무엇인가를 일깨워 준다.

비각에 새겨진 글의 첫 머리를 놓칠 수 없다.

“세조 때 문신인 김탁영은 일찍이 ‘호남 영남 두 곳은 국가 인재의 부고(府庫)다’고 단언했다.

인재의 들고 남에 지역별 선후가 있겠는가 만은 호남은 조선왕조 초기부터 충신과 열사가 끊이지 않았다. 선비들이 학문을 외우고 본받으며 서로 더불어 강론하는 것은 물론 어버이에게 어질고 인륜을 두텁게하는 도리와 임금을 사랑하고 윗사람을 섬기는 의리였다. 그리하여 의리가 훌륭하게 밝혀지고 풍속이 기절을 숭상하게 되었으니 문물의 고향이요, 선비가 많은 땅이라. 참으로 호남이야말로 인재의 보고라 아니할 수 없다.”

호남인의 호기로움을 한마디로 설명해주는 명문장이 아닐 수 없다.

위기의 순간에 더욱 빛나는 것이 진정한 마음일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보름 만에 한양이 함락되고 전국이 잿더미가 되어 임금은 서쪽 의주로 피난하게 되니 나라가 회복될 기미는 전혀 없었다. 무사와 건장한 장수와 병졸들은 도망치고 숨느라 겨를이 없었다.

이 때 오로지 조정에서 물러나 시골에서 책을 읽는 선비들만이 난리 소식을 듣고 떨쳐 일어나 피를 뿌리고 단에 올라 강개 분격하여 죽기를 맹세한다.

도내 뜻있는 의사들이 소식을 듣고 감동하여 의병을 거느리고 달려온다. 곳곳에서 호응하여 빈주먹을 불끈 쥐고 칼날을 무릅쓰고 앞사람이 죽으면 뒷사람이 잇고 관청에 달려가 전황을 물으며 전쟁에 나가 죽겠다는 자가 끊이지 않고, 목숨을 버려도 걱정하지 않았으니 이것을 누가 시켜서 그랬겠는가. 다만 충의로서 격려하여 오로지 나라와 임금의 위급을 염두에 둘 뿐, 자신의 안위는 아랑곳 않았던 까닭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할 때 오천은 나이가 49세였다. 지금은 청년기로 볼 수 있지만 당시 연령대를 감안한다면 지금의 70대에 해당하는 노년으로 볼 수 있다.

때문에 비분강개는 하늘을 찌를 듯 하지만 늙은 몸을 한탄하며 우국의 격문을 남긴다. 그것이 남문창의격(南門倡義檄)이다.

“아아 노쇠하고 못난 이 사람이 삼가 뜻을 같이하는 선비들에게 고합니다. 명아주 지팡이를 짚고 북극의 별을 바라보며 생각하매 누구나 왕의 은혜를 입지 않는 이가 없으니 이는 우리 거룩한 조정의 어진 교화 결과입니다. 그런데 어찌 뜻하였으리오. 국운이 중간에 쇠퇴하니 섬 오랑케가 밖으로 으르렁거리며 꿈틀거려 왜가 우리를 침범하고 있습니다.

아아, 우리 호남 50 고을에 의기 있는 남아가 어찌 없겠습니까. 돛대를 치며 강 위에서 맹세한 사나이의 지극한 정성을 기다리는 간절함과 창을 들고 죽음을 다투는 의기로 왕의 은혜에 보답한다면 얼마나 큰 본받음이겠습니까.

이 못난 사람이 나이는 비록 늙었으나 뜻은 적개심이 간절하여 말에 오르는 용기를 보이니 산줄기를 오르내리는 장수의 마음으로 더욱 경고해지고 물결을 휘감는 태공의 기운이 장합니다. 이에 부로와 호걸들을 초청하오니 본 장성현 남문의 의청(義廳)에 모여주시기 바랍니다”

이 격문을 받아든 각 고을의 선비와 청장년들은 울분의 주먹을 불끈 쥐고 義의 깃발 아래 구름처럼 몰려든다.

1593년 6월, 군오를 점검하니 의병이 836명, 의곡이 692석이 모였다.

천지의 뜨거운 기세에 감격한 오천은 마침내 두 아들을 불러 이른다.

“내가 이미 병들고 늙어 전장에 나가지 못하겠으니 차라리 죽어 나라의 비극을 듣지 않느니만 못하구나”

연로한 몸 때문에 의를 눈앞에 두고도 실천에 옮길 수 없음을 한탄하는 아버지, 그러자 아들이 즉답한다.

“천륜으로 말하자면 아버지를 떠날 수가 없고, 대의를 생각하면 임금을 가히 저버릴 수 없으니 가르침을 받기 위해 먼저 전장에 나가 죽기를 청합니다”

극후, 극순 두 아들을 비롯한 족제 등이 의병을 거느리고 의곡을 운반하며 먼저 일어난 군대와 합하여 나라를 위해 죽겠다는 의지를 불태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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