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업은 진정성으로 승부한다는 믿어
IMF 때도 끄떡없었던 우직한 승부수
진원 선동·석전마을 양정수 이장
“마을화합은 제가 책임집니다!”
진원면 선적1리 선동·석전마을 양정수(66)이장은 97년 한 해에만 100억 상당의 쌀을 판매한 전남 최고의 ‘판매왕’이다.
양정수 이장은 진원농협 재직시절 농협RPC(미곡종합처리장)에서 판매부장 업무를 맡으며 91년 한 해 2억 원의 판매고를 올린 것을 시작으로 94년에는 70억이라는 경이로운 판매실적을 기록해 전국단위 농협에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올리게 된다.
양 이장은 95년도 당시 부산 서면에서 지역 쌀 판매촉진행사가 있었는데 당시만 해도 지역색이 강하던 시기라 껌 하나를 사더라도 해태 껌이니 롯데 껌이니 따지며 샀던 시기에 가뜩이나 갈등의 골이 깊었던 부산에서 전라도 장성의 쌀을 팔아야 했으니 얼마나 막막했을까 짐작조차 힘든 상황이었을 터다.
목청껏 떠들며 홍보를 해도 그 누구도 거들떠보지도 않는데다 모두가 지쳐 갔지만 양 이장은 묵묵히 일을 수행하며 언젠가는 사람들이 진정성을 알아줄 것이라 믿었다고 한다. 양 이장은 출근하자마자 농협 마당을 쓸고 또 쓸었다고 한다. 판매가 안 되니 그렇게라도 해서 눈에 띄고 싶었다는 것. 이런 양 이장의 진실이 보였던지 해당 농협관계자가 비질하는 양 이장에 다가와 이유를 물었고 양 이장이 “쌀 판매가 여의치 않아 비질이라도 열심히 한다며 품질에는 자신 있으니 일단 맛만이라도 보시라”며 권유한 것이 자연스럽게 판매망을 넓히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동료 대신 명퇴 택한 ‘의리의 사나이’
양 이장은 그때를 회상하며 “지금이야 웃으며 얘기할 수 있지만 당시엔 아침에 출근하며 간이고 쓸개며 다 빼놓고 일한다는 각오로 임했어요. 피눈물도 흘릴 각오로 말이죠. 내가 미쳐야 산다고 생각했거든요. 정말이지 오직 목표 외에는 아무것도 안보였던 것 같아요”라고 얘기한다. 그야말로 ‘진심이면 통한다는 진리를 깨우쳐준 격’이라고.
양정수 이장은 이를 계기로 그해 진원농협 상무로 특별 승진하게 된다. 승진 이후에도 양 이장은 97년 한 해에만 매출 100억이라는 경이로운 판매실적을 올리는 등 뛰어난 영업 수완을 발휘하게 된다.
그렇게 승승장구하던 즈음 갑자기 밀어닥친 IMF의 모진 한파는 양 이장도 피할 수 없었다. 감원을 해야만 하는 상황에서 감원 대상으로 지목된 동료가 마침 부인의 상까지 당했다는 것. 그런 동료를 떠나보낼 수 없었던 양 이장은 차라리 자신이 떠나야겠다며 명퇴를 택했다고 한다. 가족과 주위의 만류도 많았지만 영업부장 시절을 거치며 겪었던 어려움과 극복과정을 돌이켜 보면 무슨 일이든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고 회상한다.
그것이 오히려 전화위복의 계기가 됐던 걸까? 퇴직한 지 3개월가량 지나던 때 농협에 근무하면서 알게 된 지인으로부터 비료회사 입사를 제의 받게 되었다고 한다. 영업에는 어느 누구보다 자신 있었던 양 이장은 흔쾌히 입사 제의를 받아들이고 다시 비료회사 영업본부장을 맡아 10여 년을 일했다. 양 이장에 따르면 비료회사 재직 10여 년 봉급이 농협에 다니던 30년 봉급보다 많았다고 한다.
진심이면 통한다!
영업을 잘하는 비결이 궁금해 묻자 양 이장은 “사람을 대할 때 거짓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진정성을 가지고 사람을 대할 때 그 진정성은 반드시 빛을 발휘한다고 조언해준다. 이어 “때론 거짓말도 해야 할 때는 해야 한다.”며 상대방의 기분과 취향에 맞춰줘야 하기 때문에 때론 이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것. “배려해주고 친근하게 다가서야 한다.”고 설명한다.
이렇듯 사람과 이웃에 대한 배려가 몸에 베여서 일까? 양 이장은 퇴직하고서는 이웃에 봉사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혀 이장이 됐다고 한다. 6년 여간 이장 생활을 하며 주민화합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양 이장은 어르신들 몫으로 식비가 제공되는데 제때 안 드시는 어르신들로 인해 남은 비용을 활용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은 주민들이 한데 모여 대청소를 끝내고 공동으로 잔칫상을 차려냈다. 처음에는 저조하던 참여율이 언제가 부터는 한 사람도 빠지지 않고 모여 마을주민 모두가 한 가족처럼 어울린다고 한다.
착한 마을 '선동'
선동은 옛날에는 진원고을에서 장성으로 넘어가려면 밤탯재를 넘었는데 이 마을 사람들이 인심이 좋아 과거보러 가는 사람이나 지나가는 객인에게 대접을 후하게 잘하여 특히 과거를 보러 가는 선비들은 꼭 밤탯길로 넘어가려고 했으며 그때 착한 마을로 소문이 나 善洞으로 불리게 됐다. 이곳 여자들이 시집을 가면 ‘선동 댁’으로 불리게 되는데 부근의 타 마을 여자들도 시집가서 ‘선동 댁’으로 불리기를 원했다고 한다.
선동시장을 일제 말에 막기 시작해 해방이 될 때 중단됐다가 1950년대 초에 다시 착공하였는데 그 당시 저수지 부지로 들어간 집들이 아래로 내려와 새로운 터를 잡았다하여 ‘새터’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선동마을 입구 482번지에 있는 팽나무는 높이 30m 둘레 30m의 크기로 수령이 300년 이상 지났다고 알려졌다. 또 이 마을 220번에는 4칸 겹집 기와로 울산 김 씨의 제각인 긍구제(肯溝齋)가 있다.
또 석전마을은 돌이 많아 석전(石田)이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한다.
마을이 마치 배와 같은 형국으로 생겼다하여 샘을 파면 배가 가라앉는다고 해 파지 못하게 했으며 한 우물을 먹어야 마을이 좋아진다고 했다. 개인우물을 판 후부터 마을에 좋은 일이 생기지 않게 되었다고 하며 일설에 마을이 자라 등처럼 생겼다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