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께 하실라요?
  • 최현웅 기자
  • 승인 2018.06.19 13: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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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장님은 새내기 대학생”
40여년 꼼꼼한 메모·정리 습관
마을 위한 일이라면 무슨 일이든...
북이면 사거3리 김요현 이장
사거3리 김요현 이장이 홍길동의 씨족이 모여 살았다는 홍씨 씨족마을터를 가리키고 있다.
사거3리 김요현 이장이 홍길동의 씨족이 모여 살았다는 홍씨 씨족마을터를 가리키고 있다.

북이면 사거3리(복룡·묘동) 김요현 이장(71세)의 개인택시 앞좌석 칸엔 항상 손때 묻은 사전이 세권 있다. 영한사전과 한영사전, 그리고 옥편. 젊은 시절 못 다했던 학업의 꿈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김 이장의 학구열은 대학입시를 준비하는 수능 준비생의 각오 못지않게 진지하다.

프레시맨. 올해 대학 1학년 새내기인 김 이장은 낮엔 택시를 운전하고 밤엔 정읍에 있는 전북과학대로 등교하는 71살 늦깎이 대학생이다.

배움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마을 곳곳마다엔 김 이장의 손길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다. 마을회관앞 게시판에서부터 회관 내 보드판까지 깨알 같은 글씨로 기증자와 도움주신 이들의 이름과 날짜, 금액 등을 꼼꼼하고 촘촘하게 기록해 놨다.

김 이장이 꺼내 보이는 다이어리엔 빼꼼히 기록된 수년간의 기록물이 간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이 다이어리에는 그날그날의 날씨에서부터 마을의 온갖 대소사까지 촘촘히 기록되어 있었다.

김요현 이장의 다이어리. 날짜별로 날씨정보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김요현 이장의 다이어리. 날짜별로 날씨정보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80년대부터 쓰기 시작했던 거래장부며 사소한 일상을 기록한 다양한 기록물을 정리해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는 김 이장은 일기 쓰듯 모든 일들을 기록해뒀다고 한다. 그 덕분에 금전관계나 마을 내 분쟁이 일어날 때도 예전에 기록했었던 자료를 꺼내 보이면 금세 해결되곤 한다고.

스물 대여섯 무렵, 농사를 짓던 시절엔 장성군에서 쌀 다수확 상을 받았을 정도로 농사에 대한 열정도 있었지만 몇 년 후엔 오히려 수입이 감소하는 등 어려움을 겪자 건설회사 등 여러 직업을 전전하다 화물차를 몰게 되면서 운전자 생활을 하게 됐다고 한다. 10여 년 전만 해도 화물차와 택시영업을 함께 했었는데 그땐 수입이 꽤 괜찮았노라고 얘기한다. 특별히 콜을 부른 손님이 아니라면 오가는 길에 마을 주민을 태워오는 인심도 좋은 이장님 역할도 빼놓지 않는다.

군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400여년 넘는 느티나무.
군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400여년 넘는 느티나무.

두 번 만나 결혼날짜 잡아

마을교회 목사의 소개로 지금의 아내를 소개받았다고 하는데 얼마나 급했는지 두 번째 만남에 결혼날짜를 잡았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금술도 좋아 6남매를 낳아 남부러울 거 없이 잘 키워냈다고.

“있는 집 자식들은 풍족해도 불평불만을 드러내며 속 썩인다고 들었는데 우리 집 아이들은 고맙게도 크게 부모 속 안 썩히고 곱게 자라주었어. 대견하고 고맙지.”라며 자녀교육 잘시 킨 부모보다 오히려 자녀들에게 고맙다고 말한다.

빼어난 풍광과 맑은 공기 탓에 이곳 사거3리도 요즘 귀농 귀농을 문의해오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도시로 나가 비어 있는 집일지라도 선뜻 팔겠다고 나서는 주민은 별로 없다고. 김 이장에 따르면 돈 몇 푼 보자고 자신과 부모가 살았던 집터를 쉽사리 처분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귀띔해 준다.

그럼에도 최근 개교한 전남최초 기숙형 중학교인 백암중학교의 인기를 업고 마을로 전입해 오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해 이곳 마을로 이사해온 노부부도 어느덧 이웃이 됐다.

마을 운영위원회와 함께 마을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가 항상 논의하고 토론해 최선의 방법을 찾아낸다는 김 이장. 마을과 주민들에게 이득이 될 일이라면 어디든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는다는 김 이장. 김 이장의 개인택시는 오늘도 주민들을 태우고 씽씽 달린다.

마을 곳곳에 널려 있는 사기그릇 조각
마을 곳곳에 널려 있는 사기그릇 조각

마을 곳곳에 산재한 사기그릇 조각

복룡마을은 마을 이름의 유래는 확실치 않으나 저수지 옆에 있는 진등이 용이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하여 ‘복룡’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고 한다.

아직도 이 마을 곳곳엔 깨진 사기그릇 조각이 흙더미에 묻혀 있어 예전에 이 마을이 사기그릇을 구웠던 가마터가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또 지금은 마을 위 복룡저수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투구봉 밑에 ‘성심암’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이 암자에 빈대가 하도 들끓어 폐사했다 한다. 그야말로 빈대 때문에 초가삼간 태운다는 속담에 딱 들어맞는 격이다. 현재도 절터가 그대로 남아있으며 아직도 기왓장과 주춧돌 등 건축자재가 발견되고 있다고 한다. 성심암터 바로 밑 계곡에는 홍길동의 집안 홍씨들이 씨족을 일구며 살았다는 홍씨 씨족마을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곳 역시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다.

마을 중앙에는 수령이 400여 년 된 당산나무가 있는데 군이 지정한 보호수로 지정돼 관리되고 있는데 그 굵기가 장정 3사람이 안아야할 정도로 굵다.

묘동마을은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여뀌풀이 많이 난다하여 요골이라 하다가 묘골로 변음된 후 일제 때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묘동이라 하였다는 말이 있으나 200년 전 기록인 호구총수에 이미 묘동으로 기록돼 있다. 또 마을에 매화락지 명당이 있어 매동이라 하다가 묘동으로 변했다는 말도 있다.

마을 뒤편 도로변에서 바라본 복룡마을 전경
마을 뒤편 도로변에서 바라본 복룡마을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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