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권력자 애첩에게도 뇌물
조선시대, 권력자 애첩에게도 뇌물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02.20 13: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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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반찬 살 물건을 일컬었던 선물(膳物)

마음 놓고 주고받는 선물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흔히 말하는 주는 사람도 기쁘고 받는 사람도 기쁜 선물 말이다.

그런데 자칫 그 경계를 벗어나면 뇌물이라는 오명을 쓰고 추락하게 된다.

그렇다면 선물과 뇌물의 차이는 어디까지 일까?

‘받고 잠을 잘 자면 선물, 그렇지 못하면 뇌물’ 그리고 ‘다른 직위에 있어도 받을 수 있으면 선물, 아니면 뇌물’이라는 간단한 구분법이 있다.

‘미암일기’를 저술한 미암 유희춘(1513~1577)은 선조 임금의 어릴 적 스승이었던 대유학자였다. 선조는 “내가 공부다운 공부를 하게 된 것은 희춘에게 힘 입은 바가 크다”고 말할 정도로 그의 인품과 학문을 인정받았다.

미암은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하던 중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됐다가 선조가 즉위하자 석방되어 전라도관찰사와 예조참판을 지내며 윤택한 말년을 보낸다.

전라도 해남 태생이지만 처갓집이있던 담양과 해남을 오가며 생활했는데 미암일기에는 그가 죽기 전 10년 동안 당시의 잔치나 혼례풍습을 비롯, 소소한 일상생활을 적고 있다. 정치상황으로는 왕실과 정국의 동향, 사신접대, 관직 복무에 이르기까지 기록해 놨다.

이 미암일기에는 당시에 많은 선물이 오고간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미암이 전라도 관찰사로 재직할 무렵에 미암의 지인들이 ‘처가댁인 담양으로 벼 20섬을 보내왔다’고 적고 있고, 심지어 어떤 관리는 미암의 첩에게 ‘새집을 짓는데 사용할 못과 쌀과 콩 1섬씩을 보내왔다’고 기록해 놓았을 정도로 선물이 오고갔다.

조선시대엔 이런식으로 물품이 오고갔는데 그 물품들을 ‘사람이 먹고 살 수 있는 온갖 것’이란 뜻의 식물(食物:먹을 식, 만물 물)이라고 했다. 또 ‘인정과 예의에 따라 주고받는 물건’이라는 뜻으로 선물(膳物:반찬 선, 만물 물)이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미암일기에 따르면 미암은 지방관과 동료 관료, 지인, 친인척으로부터 모두 2,855회에 걸쳐 선물을 받은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단순이 인정을 주고받는 것을 넘어 재산 증식용으로 볼 수 있는 규모였다.

선물은 장차 있을 등용에 보증수표

조선시대는 영향력을 가진 관료의 경우 예외 없이 이런 선물에 기대어 산림을 꾸리거나 재산을 증식해 나갔다. 심지어는 유배지에서 선물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16세기 초에 승정원 승지(지금의 청와대 비서관)를 지낸 이문건이란 사람은 을사사화에 연루돼 경상도 성주에 유배됐는데 이곳에서 사용하고 남은 선물을 본가에 보내기도 했다. 이런 선물들은 대부분 유배에서 풀려나 조정에 등용될 때를 대비해 지방의 관리와 지인들이 보낸 것이었다.

이들은 당장 청탁할 일이 없더라도 평소 기회 있을 때마다 선물을 던지며 권력과의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외형상으로는 자연스런 예의 수준이었지만 실상은 이해관계를 염두에 둔 철저한 거래였다. 장차 있을 등용에 대배한 사전 청탁이었거나 사업적 도움을 기대한 경우였다.

조선시대 이러한 선물 주고 받기는 양반사회의 학맥과 혼맥, 지연 등 연줄을 이어가는데 최고의 매개체였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층들의 연줄을 대단했다.

미암은 당시 관료이자 학자인 하서 김인후(1510~1560)와 사돈 관계였다. 이기론을 놓고 이황과 10여 년 동안 논쟁을 벌인 기대승(1527~1572)과는 같은 관서에 근무하며 학문을 토론하는 사이였고 시가문학의 대가인 송순(1493~1583)과도 아주 가까운 사이였다. 이밖에도 학문과 정치에서 일가를 이루고 있던 이이(1536~1584), 허준(1539~1615), 정철(1536~1593) 등과도 돈독한 교유 관계를 맺고 있었다.

조선시대의 선물은 이러한 연줄을 든든히 이어주고 지배층의 결속을 다지는 수단이 됐다. 선물은 양반체제가 형성되면서 관계를 그들끼리의 유지하고 확장해 나가는 관행이자 보증수표였던 것이다.

현대적 선물과 발렌타인데이

현대사회에서 선물은 의미가 완전히 변색됐다.

넥타이를 선물하는 것은 존경의 의미와 함께 소유를 희망하는 의미로 해석된다.

목걸이나 반지를 선물하는 것은 상대방을 독점하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시계를 선물한다는 것은 시간을 공유하고 싶다는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손수건은 흔히 이별의 의미, 즉 ‘더 이상 당신을 만나고 싶지 않아요’라는 뜻이 있다고 해서 선물로는 삼가하고 있다. 그러나 노란 손수건은 기다림과 용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알려진다.

지난 14일 연인들과 선물이나 카드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고백한다는 발렌타인 데이라고 온 나라가 초컬릿 열풍에 휩싸였다.

뜻도, 유래도 명확치 않는 외래문화지만 청소년들 사이에선 ‘서로 챙기지 않으면 미운털 박히는’ 중요한 의례가 돼버렸다.

청소년들 사이에선 발렌타인 데이가 지배하고 있지만 어른 사회에서는 김영란법이란 것이 지배하고 있다.

자칫 뇌물이란 오명을 쓰기 쉬운 선물, 주기에도 찜찜하고 받기에도 찜찜하다. 주고받을 때 잠이 잘 오면 다행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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