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독립선언서 100주년을 다시 새긴다
기미독립선언서 100주년을 다시 새긴다
  • 장성투데이
  • 승인 2019.02.27 1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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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처음 이름이 ‘개똥이’였던 소년은 나중에 이름을 이명복으로 고쳤다.

그리고 이 소년은 11살인 1863년 12월 조선의 왕이 된다. 전 왕인 철종이 아들이 없이 죽자 이리저리 이 씨 왕족의 계보를 따져 특별한 족보가 없는 흥선대원군의 아들이 왕의 자리에 오른 것. 이른바 고종황제였다.

이렇게 황망하게 왕위에 오른 개똥이는 500년 역사의 조선이 망하는 비극적인 마지막 왕이 된다.

개똥이는 일제의 식민지배의 허수아비 노릇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망국의 군주로 살았다.

그의 나이 67세, 덕수궁에서 평소 야참으로 마시던 식혜를 마시고 잠이 들었다가 깨어나 목이 마르다며 차를 마신 뒤 의문의 사망한다. 1919년 1월 21일이었다.

개똥이는 비참하게 죽어갔지만 조선총독부의 독살설을 달고 다니며 조선인의 애국심을 들끓게 만들어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기폭제 역할을 한다.

장례식이 치러지는 1919년 3월 1일, 개똥이는 마지막 가는 길에 ‘기미독립선언서’를 뿌리고 간다.

그 100주년을 맞아 마음을 가다듬고 그 일부를 살펴보자.

⌜오등(吾等)은 자(慈)에 아(我)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하노라.

차(此)로써 세계 만방에 고하여 인류 평등의 대의(大義)를 극명(克明)하며 차로써 자손 만대에 고(誥)하여 민족 자존의 정권을 영유케 하노라.

반만 년 역사의 권위를 위하여 차를 선언함이며 2천만 민중의 성충(誠忠)을 합하여 차를 표명함이며 민족의 항구 여일한 자유 발전을 위하여 차를 주장함이며 인류적 양심의 발로에 기인한 세계 개조의 대기운(大機運)에 순응 병진하기 위하여 차를 제기함이니 시천(是天)의 명명(明命)이며 시대의 대세이며 전인류 공존 동생권의 정당한 발동이라, 천하 하물(天下何物)이든지 차를 저지 · 억제치 못할지니라.⌟

1919년 3월 1일, 2시 민족대표 33인 중 29명이 기생요릿집인 태화관에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축배를 들었다. 민족대표들은 태화관 주인에게 조선총독부에 전화를 걸어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열고 있다고 연락하게 했고, 전화를 받은 일본 경찰 80명이 태화관으로 들이닥쳤다. 한용운의 선창으로 만세삼창 후에 이들은 일본 경찰에 연행됐다.

처음엔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할 계획이었으나 많은 군중들 사이에서 폭력사태가 우려돼 태화관으로 장소를 바꾼 것이었다. 이러는 사이 탑골공원에서는 수천의 국민들이 모여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알리는 독립선언서가 뿌려진다.

1,762자로 된 이 선언문은 오늘날 전해지는 각국의 어떤 독립선언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명문으로 평가받고 있다.

잊어서는 안 될 100년 전 우리 선인들의 활동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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