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변절의 아이콘 신숙주 - 백형모
[칼럼] 변절의 아이콘 신숙주 - 백형모
  • 백형모 기자
  • 승인 2019.10.07 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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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죽하면 잘 상하는 숙주나물이었을까?

우리 전통 음식 가운데 하나가 숙주나물이다.

녹두의 어린 싹을 데쳐 먹는 숙주나물은 아주 쉽게 상하는 음식이어서 빨리 먹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서 ‘숙주나물’은 변절의 상징이다.

이 숙주나물의 이름이 조선 초기 신숙주(申叔舟, 1417~1475)로부터 나왔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다.

세종대왕의 신임을 받았던 충신 신숙주가 세종으로부터 ‘어린 손자인 단종을 잘 보필하여 성군이 되도록 하라’는 하명을 받았으나 그 약속을 어기며 어린 단종의 숙부인 세조의 등극을 돕고 세조에 충성해 권력을 누린 변절의 역사를 빗대어 조롱하는 뜻으로 훗날 붙여진 이름이 ‘숙주나물’이다.

숙주나물의 진실은 무엇일까?

역사적으로 보면 신숙주는 능력있는 신하였다. 글재주가 뛰어난 언어학자요, 문장가, 외교통역관, 역사가로 알려져 있다.

신숙주는 젊은 시절부터 발군의 능력을 보였다. 21세 때인 1438년(세종 20) 생원ㆍ진사시를 동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문과에서 3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급제했다.

이때부터 세종대가 끝날 때까지 그는 집현전 부수찬(종6품)을 비롯한 요직을 두루 거쳤다.

이 시기의 경력에서 중요한 것은 우선 26세 때 서장관(書狀官)으로 일본 사행에 동참한 것을 들 수 있다. 서장관은 지금의 대사급 외교관으로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를 보좌하면서 사행을 기록하고 외교 문서의 작성을 맡은 중요한 직책으로, 당시의 가장 뛰어난 젊은 문관(4~6품)이 맡는 것이 관례였다. 젊은 신숙주는 신변의 위험을 무릅쓰고 일본 본토와 대마도를 거치면서 문명(文名)을 떨치고 여러 외교 사안을 조율했다. 특히 대마도주를 설득해 세견선(歲遣船)의 숫자를 확정한 것은 중요한 성과로 평가된다.

다음으로는 1450년(세종 32) 중국에서 예겸(倪謙)과 사마순(司馬恂)이 사신으로 왔을 때 그들을 접대하면서 뛰어난 문학적 능력을 발휘한 것도 특기할만하다. 예겸은 자신이 지은 [설제등루부(雪霽登樓賦)]에 신숙주가 걸어가면서 운을 맞춰 화답하자 “굴원(屈原)과 송옥 (宋玉) 같다”면서 감탄했다. 이때 한 살 차이인 동료 성삼문(成三問, 1418~1456)도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하지만 그 뒤 두 사람은 전혀 다른 인생의 궤적을 밟게 된다.

신숙주는 세종의 뒤를 이어 임금의 자리에 오른 문종 2년에 수양대군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친분을 쌓게 된다.

많은 사람들에게 그렇듯이 인생의 중요한 전기는 다른 사람과의 만남에서 비롯된다.

신숙주도 그러했다. 그의 일생에 가장 큰 전기를 제공한 사람은 얼마 뒤 세조로 등극하는 수양대군(1417~1468)이었다. 두 사람은 동갑이었다.

그전에도 서로 알고 일정한 교류는 있었겠지만, 운명이라고 말할 만큼 친밀도와 중요성이 급증한 계기는 35세 때였다. 그때 수양대군은 사은사(謝恩使)로 중국에 파견되기 직전이었다. 수양대군의 중국 파견은 왕위를 넘보던 수양대군을 중앙에서 일정하게 격리시키려는 좌천의 의미가 큰 조처였다. 다시 말해서 수양대군에게는 어떤 결단이 필요한 중대한 시점이었던 것이다.

그때 수양대군은 우연히 신숙주와 술잔을 나누면서 “사람이 다른 일에는 목숨을 아끼더라도 사직을 위해서는 죽을 수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신숙주와 동지애를 느끼고 중국행에 동행을 제안한다.

수양대군과 신숙주가 중국여행에서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는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오랜 외국 여행 동안 동고동락하면서 그의 정치적 야심과 신숙주의 경륜이 운명적으로 결합했으리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들이 그때 구상했던 ‘집권 계획’들은 문종이 즉위 2년 만에 서거하고 단종이 13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일으킨 계유정난으로 구체화된다. 계유정난이란 단종 즉위 2년 만인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의 보좌 세력이자 원로대신인 황보인·김종서 등 수십 인을 살해, 제거하고 정권을 잡은 사건이다.

계유정난이 일어났을 때 신숙주는 변방외직에 나가 있어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 모의에서 면피했다고 볼 수 있으나 세조가 집권한 뒤에 세조를 보필하며 그야말로 화려한 출세를 거듭했다.

그는 1454년(단종 2) 도승지(지금의 청와대 비서실장)를 시작으로 병조판서, 좌우찬성, 대사성을 거쳐 세조 3년에는 40세의 젊은 나이로 우의정에 올랐으며 5년 뒤에는 최고의 지위인 영의정에 임명되었다.

신숙주는 세조가 집권 14년 만에 죽고 예종이 19세로 즉위하자 한명회, 구치관과 함께 최고 지위인 원상(院相)에 임명되었고, 예종이 1년 만에 급서하고 성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등극하자 또다시 영의정에 제수되어 4년 가까이 재직했다.

개인적 영달로 보면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등 여섯 임금을 섬기며 한국사에서 최고의 관직을 누린 사람으로 기록된다. 세종 때는 훈민정음 창제에 공을 세웠고 세조 때에는 동북 방면 전쟁터에 나가 여진족을 토벌했고, 《동국통감》 등 많은 책을 편찬했다.

하지만 수양대군의 왕위 찬탈을 반대하며 충절을 지킨 사육신, 생육신과 비교되면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 사육신들은 죽음을 택하면서까지 세조가 왕이 되는 것을 반대했고 생육신은 벼슬을 벗어던지고 초야에 묻혀 세조의 등극을 비난했다.

자신을 고위 권력의 자리에 앉힌 세종을 배신한 신숙주, 문재인 대통령으로부터 검찰총장을 임명받고도 강하게 저항하는 윤석렬, 둘이 다른 듯 하지만 권력을 둘러싼 행보의 끝은 달라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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