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최미숙 장성교육장의 건배사...(새해 첫날의 기적)
[편집국 칼럼] 최미숙 장성교육장의 건배사...(새해 첫날의 기적)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0.01.20 10:5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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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장성군지역경제인협의회 신년 인사회가 열렸다.

훌륭하신 많은 분들이 자리를 가득 메웠다. 장성에서는 모두 수신제가(修身齊家)를 이루시고 치국(治國)은 아니더라도 최소한 치사치지(治社治地)의 반열에 오르신 분들이었다. 축사와 격려사가 이어지고 덕담도 오르내렸다. 하지만 여느 멋진 말씀보다 홍일점 최미숙 장성교육장님의 건배사가 큰 스님의 법어처럼 장내에 잔잔한 울림을 만들어 냈다.

건배사가 아닌 박칠환 시인의 <새해 첫 기적>이란 간단한 시 한편이었다. 이름도 잘 모르는 시인의 작품이지만 이상한 끌림에 그대로 몰입해진다. 그 시를 접하고 심야에까지 책상 앞에 앉아 곰곰이, 읽고 또 생각하기를 거듭해본다.

<새해 첫 기적>

황새는 날아서

말은 뛰어서

거북이는 걸어서

달팽이는 기어서

굼벵이는 굴렀는데

한날한시 새해 첫날에 도착했다.

바위는 앉은 채로 도착해 있었다.

아, 이건 무슨 감흥이련가.

불과 일곱 횡간에 걸린 시인의 마음이 그렇게 바위처럼 인간을 멈추게 할 수 있는 것인지...

​황새와 말과 거북이와 달팽이와 굼벵이가 우리 앞에 나타났다.

나타나기까지는 퍽이나 오랜 시간을 뛰고 날고 구르고 기어서 왔다. 같은 하늘을 이고 살아오는 동안에 비도 눈도 내렸을 테고 먹구름에 앞이 안 보이는 날도 있었으리라.

저마다 서로 다른 숲과 하늘에서, 서로 다른 몸짓과 보폭으로, 서로 다른 방식으로 열심히 살아온 이들이 모여서 새해의 벅찬 출발을 함께 맞는다.

그렇게 어찌어찌하여 숙명처럼 모인 것이 새해 첫날이다.

백년을 산다는 황새나 7년을 땅속에 사는 굼벵이나, 한 하늘 아래서 꿈틀거리며 살다보니 살아왔고, 구르다보니 여기까지 오게 됐다. 바삐 온다고 날개 짓도 했고 서둘러도 봤다. 굼벵이가 온 몸에 땀 흘리며 뒤뚱뒤뚱 구르고 굴러서 여기까지 왔다. 모두가 살아갈 이유가 있어 한 자리에 열심히 모인 것이지 1등과 2등 3등으로 왔다는 것은 아무 필요 없다.

첫날은 우리에게 그렇게 다가왔다.

그렇게 우리들은 출발선에 나란히 섰다.

몸무게도 거기가 거기, 키도 거기가 거기, 얼굴도 거기, 모두가 비슷하다.

이들 생명체에게 존엄함이 다를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동시대인이다.

함께 숨 쉬고 산다.

꼭 함께 살 수 밖에 없는 ‘우리’다.

뿐만 아니다.

천년 만년 영겁의 세계를 살고 있는 바위도 우리와 함께 동시대인으로 동참하고 있다.

천년에 한 번씩 숨을 쉰다는 바위가 묵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여보시게들, 오시느라 고생했네,

그렇게 오다보니 와 지제?”

그러면서 한마디 더 덧붙인다.

“힘들게 그렇게 높이 날아오느라, 그렇게 어렵게 기어 오느라 왔는데

다 같이 여기 있었구먼...”

바로 그랬다.

그렇게 근엄하게 다독이는 바위에게 우리가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

거꾸러지지 않고, 추락하지 않고 모두들 여기까지 온 게 다행 아닌가.

그런 바위 옆에서 어찌 거짓말을 하고 서툰 행동을 할 수 있겠는가?

모두가 숙연할 뿐 말이 필요 없다. 그저 끄덕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다보면 사방천지가 모두 귀천이 없는 무등(無等)의 세계로 돌아선다. 그 세계는 평등의 세계요 공정의 세계다. 정의라는 이름이 큰 형님 행세를 하는 세상이다.

어느 존재에 낫고 못함이 있겠는가.

어느 존재에 낮고 높음이 있겠는가.

고르고 가지런한 게 우리 아니겠는가.

새해가 시작되어 새해의 끝이 될 때까지 우리는 같은 우리일 수 밖에 없다.

시인 박칠환의 또다른 시를 대뇌이다 새벽녘을 훌쩍 넘기며 글을 접는다.

한겨울에 눈발 속에서 유난히 빛나는 붉은 동백꽃망울처럼 영롱한 시어다.

<때>

무릎이 구부러지는 건

세상의 아름다운걸 보았을 때

굽히며 경배하라는 뜻이고

세상의 올곧지 못함을 보았을 때

솟구쳐 일어나라는 뜻이다.

그렇다.

세상사의 이치가 어찌보면 그리 어렵고 큰 것이 아니다.

2020년엔 우리 모두가 올해는 조금 덜 희망하게 하고, 조금 덜 후회하게 하길 소망한다.

그리고 조금만 더 사랑하게 해 주길 소망한다.

2020년 1월 17일 자시/편집국장 백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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