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오, 코로나 악령이여! 저들의 참회를 원하십니까?
[편집국 칼럼] 오, 코로나 악령이여! 저들의 참회를 원하십니까?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0.04.13 11:5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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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하자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탈리아 로마 시내의 산타 마르첼로 알 코르소 성당을 찾아 기적의 십자가 앞에서 코로나바이러스의 종식을 기도했다. 로마의 신자들이 1522년 이 십자가를 앞세우고 참회의 행진을 하자마자 이 도시에서 흑사병이 물러갔다고 해서 기적의 십자가로 불리는 현장이다. 교황은 기적이 일어나기를 기도했다. 그러나 기적 대신 수백만 명의 감염자가 생겼다.

교황의 염원 대신 지금 미국 뉴욕에선 고스트 시티(유령의 도시)가 재현되고 있다.

거리엔 사람이 없고 찬바람만 부는 스산한 도시가 되고 있다. 사연 모르는 개와 고양이가 거리를 활개치고 있다. 인간이 인간을 두려워하여 서로 회피하고 있다. 야음을 틈타 인간을 노리는 좀비가 나타날지 모른다.

참으로 끔찍하다. 공상 영화가 아닌 현실이다.

문제는 이러한 사태가 태평양 건너 미국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도 기회만 있으면 어느 한순간에 덮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누구에게 목매여야 하는가?

우리가 믿지 않았던 신을 찾아야 하는가?

아니면 그저 형식적으로 믿었던 신을 이제 저 밀물같은 공포감을 뿌리치기 위해 찾아야 하는가? 하나님인가, 부처님인가, 알라신인가.

우리가 찾는 대상은 저 멀리에 계실뿐, 우리는 신이 아닌 인간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한반도에서 태어나 죽게 될 운명을 지닌 보통의 범인(凡人)일 뿐이다.

그래서 TV를 보다가 놀래기도 한다. 전 세계 코로나 감염자가 50만을 지나더니 금새 100만을 넘기고 며칠 사이에 200만을 바라본다. 내일이면 또 어떻게 바뀔지 상상을 초월한다.

각국의 지도자들이 밀물처럼 밀려오는 악령을 막아보려 아무래 발버둥을 쳐도 역부족이다.

하물며 개미와 같은 존재인 개인은 아예 방법을 떠올리기에도 부족하다. 쓰나미처럼 휩쓸릴 판이다.

얼마나 많은 참회를 해야만이 이 역경을 헤쳐 나갈 수 있을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을 한자 한자 읽어가며 자기애(自己愛)만 가득했던 지난날의 과오를 씻어 내려가면 될 일일까?

아니면 윤동주의 ‘참회록’을 구리철사로 다시 베끼며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이다지도 욕될까...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고 다짐해볼까.

참회(懺悔)의 의미를 다시 보자. 뉘우칠 ‘懺’, 뉘우칠 ‘悔’로, 똑같은 뉘우침의 뜻을 담고 있지만, ‘참(懺)’은 지나간 허물에 대한 반성이고 ‘회(悔)’는 미래를 향한 다짐의 뜻을 담고 있다. 반성과 다짐을 함께해야 한다고 주문하고 있다.

우선 처절한 반성이어야 한다.

남과 관계없이 나만 잘되고 나만 행복하면 된다고 믿어온 나를 채찍질하는 뉘우침이어야 한다. 나보다 더 못 배우고 나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에게 소원했던 나를 채찍질하는 뉘우침이어야한다. 그동안 나만 중요한줄 알았지 남의 아픔과 배고픔을 모르고 배려하지 못한 비인간적인 소행에 대한 채찍의 뉘우침이어야 한다.  

그 다음은 미래를 위한 다짐이어야 한다.

이웃과 더불어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새로 깨닫게 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잘 못 가고 있던 길을 되돌아보고 반성하는 시간이어야 한다. 온 인류가 쉽고 빠르게, 맛있고 즐겁게 만을 추구해온 행태에 대한 뒤돌아봄을 갖는 성찰의 시간이어야 한다.

천천히 눈을 감아본다. 눈을 뜨기까지 긴 시간을 필요로 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인류에게 명령하는 지난날의 되새김이다.                          /편집국장 백형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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