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만암정사 주인 김진웅씨
[기획특집] 만암정사 주인 김진웅씨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0.07.13 15:2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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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효행이죠”

팔순에 북이면 고향에 돌아와 ‘만암정사’ 주인으로 안착
고암 김이휴 선생 효자비 세워 귀감...한학 가르치고파

아무리 많아도 지나침이 없고,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바로 ‘효행’이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이 모든 행동의 근본으로 생각해왔던 효의 개념은 현대 사회에서 ‘무가치한 개념’으로 전락하고 있다.

가족 내에서도 예절이나 의례가 사라지고, 친척 간에도 왕래는 물론 안부도 사라지면서 사촌 이상의 친척은 남이 되고 있다.

자식들은 거동이 어려운 부모님을 요양원에 보내는 것을 당연한 수순으로 여기고, 부모들 또한 자식들에게 신세 지기 싫어 자발적으로 요양원행을 고집하는 사람도 늘고 있다.

이런 세태에 경종을 울리듯 효행의 등불이 되는 삶을 살아가는 한학자가 있어 세인의 눈길을 끌고 있다. -편집자 주-

장성군 북이면 사가묘동길 22-5에 ‘만암정사’라는 제실을 짓고 조상들의 은덕을 후세에 길이 전하고자 하는 만암 김진웅(晩巖 金鎭雄) 선생(86)이 화제의 인물이다.

만암 선생은 이곳 북이면 동령동이라는 곳에서 태어나 광주 서중, 광주고등학교, 서울대 공대를 거쳐 공학도로서 기술 관련 기업체에 다니다가 부산에서 중앙기계라는 회사를 운영해왔다. 그러나 가문에서 풍기는 학문적 DNA는 숨길 수 없다고 했던가. 60세에 들어서면서부터 울산 김씨 하서 김인후 선생의 16대 손으로서의 평소에 관심을 가졌던 가문 관리와 한학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중년까지 보냈던 부산에서 꾸준히 지역 유림들과 교유하면서 학문을 넓히고 틈틈이 서책을 펼치며 집필을 서둘렀다. 고향인 장성에서도 필암서원 도유사를 맡아왔고 2010년에는 하서 선생 탄신 500주년을 맞아 행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선친께서 마을에 건립, 운영해왔던 일심정(一心亭)이라는 정자가 낡아 훼손되자 새로 건립하고 선대의 집을 중수하여 기거할 수 있도록 만든데 이어 만암정사(晩巖亭舍)라는 제각을 건립하여 제각과 서실, 공부방을 두는 등 후손으로서의 도리를 다해왔다.

만암정사 앞에 예전부터 있던 일심정이란 정자가 낡아 새로 보수해 학문과 휴식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만암정사 앞에 예전부터 있던 일심정이란 정자가 낡아 새로 보수해 학문과 휴식공간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했다.

“8순이 훨씬 넘어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내는 것이 말할 수 없는 감개무량함이 밀려옵니다. 노년의 더 없는 행복이라 생각할 뿐입니다.”

선조들의 삶이 묻어있는 산천에서, 부모님과 가족들의 냄새가 배어있는 고향에 돌아와 건강하게 살고 있는 자신을 복 받은 삶이라 규정하고 싶다는 만암 선생. 하지만 단순히 고향에서 노후를 보내는 것이 아니라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만암 선생이 평생 동안 잊지 않고 그토록 마무리 짓고 싶었던 가업은 하서의 9대 손인 고암공 김이휴(1745~1821)와 그의 친형인 수루공의 효행과 덕업을 기리는 일이었다.

그래서 2018년에 마을 입구에 고암선생 효자비를 세워 만고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김씨 가문이나 유림들은 알고 있겠지만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고암공의 효행과 형제의 우애가 어떠했길레 그토록 갈증이 났을까?

고암공은 형인 수로공과 두 형제였다. 나이어린 11살에 부친상을 당하자 애통해하는 소리가 사람을 감동케 했으며 시묘살이에도 친형을 따라 하루도 빠짐없이 동참하고, 동참하지 못할 때에는 흙덩이를 베개 삼고 거적에 엎드려 잤다고 전해진다. 부친을 잃은 뒤에는 형을 어버이 섬기듯 앉고 서고 침묵함이 예의에 한 치도 벗어남이 없었다고 한다.

고암공은 41세의 모친이 이질로 신음하자 약을 먼저 맛보고 미음을 끓여 드리고 침구를 손수 빨아 정성을 다했으나 위독하게 되자 약 손가락을 작은 도끼로 찍어 잘라서 피를 드리워 사흘간 연명하게 했다.

고암공은 25세에 당숙모에게 양자를 갔으나 당숙 내외를 모시는 일 이외에 친형의 댁과는 10리 거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짐없이 형에게 찾아가 학문을 닦고 형님 내외를 봉양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고암공은 양자시절인 18년 동안 매일 조석문안을 올렸으며 당숙 내외가 돌아가시자 어린 세 자매를 정성으로 길러 출가시켰다.

이밖에도 전설 같은 효행, 우애의 사례들이 여러 문헌에 전래되고 있을 정도다.

하지만 고암공이 이처럼 부모에 대한 지극한 효성과 돈독한 우애, 군자다운 학식과 몸가짐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효자비 건립과 정려문을 조정으로부터 승인받지 못했다. 당시에는 이같은 효행 기록을 암행어사가 임금에게 보고해야 했으나 집안이 어려워 관가에 상납하는 관행을 따라가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서 김인후 선생의 16대 손이자 고암 김이휴 선생의 9대 손인 만암 김진웅 선생(86)이 고향인 장성 북이면 묘동마을 동령동에 건립한 만암정사 전경.
하서 김인후 선생의 16대 손이자 고암 김이휴 선생의 9대 손인 만암 김진웅 선생(86)이 고향인 장성 북이면 묘동마을 동령동에 건립한 만암정사 전경.

 

“고암공 사후 50여 년 동안 수많은 선비들과 서원향교에서 고암공의 정려문을 건립해야한다고 조정에 상소했으나 번번히 묵살당했습니다. 당시 집안의 어르신들도 ‘썩어 빠진 조정에 뇌물을 주면서까지 정려문을 세울 필요가 없다’며 지조를 굽히지 않았던 것이죠. 참으로 안타까운 세태였습니다”

만암 선생은 “하서 선생의 후손답게 차라리 당당하게 처신 한 것이 더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이러한 실상을 알게 된 장성향교의 선비들이 전국 향교에 통문을 보내고 각지에서 답문이 쇄도, 마침내 세상이 인정하는 효자비를 건립하게 됐다.

이에따라 만암 선생은 거액의 비용을 부담하여 2018년 고향 마을 입구의 갈재로 가로변에 ‘고암 김선생 효자비’를 건립하여 만세에 귀감이 되도록 했다.

“이제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륜의 근본이 무너지면서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고 삶이 피폐해지는 것을 보면 가슴이 아플 뿐입니다. 그래서 이곳을 찾아오시는 답사자들이나 뜻있는 분들에게 한학이나 한시 강좌 등을 베풀고 싶습니다”고 말한다.

고향에서 친가를 수리하여 두 부부가 살고 있지만 장성한 4형제를 두어 이들이 매주 번갈아가면서 이곳을 찾아오는 자식 복을 누리고 있다는 만암 선생은 선조들이 남긴 효행의 댓가를 자신이 너무 풍성하게 받고 있는 것이라고 겸손해 했다.

동령동 마을 앞쪽의 갈재로 도로변에 지난 2014년 건립한 고암 김이휴 선생 효자비.
동령동 마을 앞쪽의 갈재로 도로변에 지난 2014년 건립한 고암 김이휴 선생 효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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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이면민 2020-07-16 10:33:34
거기 건물 한 채가 건축허가가 안 나온 것으로 아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