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네”
[편집국 칼럼]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1.05.16 21:2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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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모 편집국장

 

조선시대 최고 한량이자 풍류남아를 꼽는다면 백호 임제(1549~1587)를 첫째로 치지 않을 수 없다.
절도사라는 높은 벼슬을 하면서도 결코 벼슬에 연연하지 않고, 문장과 풍류를 즐기며 호방한 성격을 지녔던 백호는 그 성격처럼 짧고 굵은 나이 39세로 삶을 마감한다.
그가 걸었던 길에 대한 일화의 한토막.
나주 출신의 백호는 평안도사로 임명되어 가는 길에 개성을 지나게 되는데 당대 최고 풍류 여걸로 소문나있어 언젠가 한번 쯤 만나보리라 했던 황진이가 석달 전에 죽어 개성에 묻혔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러자 백호는 닭 한 마리와 막걸리를 사 들고 그녀의 마르지 않는 무덤을 찾아가 제사를 지내주고 아쉬운 시 한 수를 남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느냐 누웠느냐
홍안은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느냐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것을 슬퍼하노라>
남자로서 그녀를 보지 못한 아쉬움도 있었겠지만 여성으로써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다간 생의 무상함에 막걸리라도 올리고 싶었을 것이다. 또 기생이라는 신분이 그저 앞에 있을 때는 즐기지만 죽은 뒤에는 그 누구도 찾지 않을, 그 시대의 세태에 자신만이라도 인간의 몫을 해보자는 뜻을 담았을 지도 모른다. 풍류를 아는 남자로서 한 줌 흙으로 돌아간 기생에게 술병을 둘러차고 찾아가 인생 허무를 곱 씹어보는 남자의 기개를 떳떳하게 보여준다.
그러자 동인과 서인으로 쪼개진 당파 싸움에서 상대 편은 이같은 백호의 행적을 전해 듣고 잘 됐다 싶어 그가 평안도에 이르기도 전에 상소를 올려 “주상 전하, 임 백호가 부임지로 가는 길에 죽은 기생한테 술을 따르고 절을 올려 미풍양속을 흐리게 만들고 있나이다”라고 짖어 댄다.
유교를 국가 철학으로 삼고 있는 조선에서 미풍양속의 규범을 크게 벗어난 백호는 어쩔 수 없이 도착하자마자 조정으로부터 파직을 당한다.
그런 일을 당한 백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그 심정은 훗날 그가 남긴 물곡사(勿哭辭)라는 시 한수에 고스란이 담겨있다. <정신 차리지 못한 못난 나라에서 내가 살면 무엇하고 죽은들 어떠하리. 슬퍼하지 말라. 내가 죽은 뒤에도 절대 곡을 하지 말아라>며 주위를 위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시에서 중국을 사대국으로 섬기는데만 빠져있는 지도층에 경고하고 부패한 시대상을 지적하며 하루라도 빨리 어둠에서 빠져 나올 것을 세상에 고하고 있다.
임진왜란을 직전에 둔 시기에 썩을 대로 썩은 조선의 한 단면을 말해준다. 당파 싸움 때문에  선비들은 상대의 권모술수에 무더기로 비명횡사하거나 스스로 낙향하기가 다반사였다.
그중에서도 그나마 백호는 천재시인이라는 평가를 받으며 호방한 성격과 매사에 불편부당한 자세로 세상을 굽어볼 줄 안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만나보지도 못한 기생 황진이와의 막걸리 한잔에 벼슬이 떨어졌으니 심사가 오죽했을까?
백호는 그래서 세태를 꼬집은 애절한 속내를 이렇게 읊었다.
<도불원인인원도 산비이속속리산(道不遠人人遠道 山非離俗俗離山)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건만 사람이 도를 멀리하고
산은 속세를 떠나지 않건만 속세가 산을 떠나네.>
그를 알아주지 못한 세상, 아무리 외쳐도 고쳐질 리 없는 세상에 대한 경고를 이렇게 보내고 39살로 세상을 떠난다. 그가 그토록 잘 되기를 바랐던 조선은 그의 사후 5년 뒤에 임진왜란이란 민족 최대의 비극을 자초한다.
그로부터 오백 년 뒤, 패권주도를 노리는 초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권력에만 눈 독 들이며 한치 앞도 못보는 대한민국의 현재와 한치도 다르지 않다.
임백호의 물곡사가 절로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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