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마이클 센델! ‘정의는 어디 가셨습니까?’
[편집국 칼럼] 마이클 센델! ‘정의는 어디 가셨습니까?’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1.08.17 11: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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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드는 모든 사물에는 본질이나 용도가 있기 마련이다.

예컨대 톱의 본질은 썰기 위한 것이다. 이런 본질을 위해 인간은 톱을 만든다. 썰지 못하는 톱은 톱이 아니다. 의자도 누군가 앉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다. 의자의 본질은 앉기에 있고, 앉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진다.

이 같은 본질의 속성을 우리 인간에게 적용하면 어떻게 될까.

인간은 무슨 용도를 염두에 두고 임신할까? 사물에 적용했던 것처럼 쉽게 대답하기에 참 난감하다. 인간의 경우에는 사물의 본질과는 다르게, 태어날 때 어떤 목적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는다. 임신한 어머니가 배속 태아에게 특정한 직업을 갖도록 부단히 태교할지라도 뜻대로 성사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대통령, 과학자, 예술가, 변호사와 같은 직업을 갖도록 어머니가 소원해도 통할 리가 만무하다.

사물과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본질이 다르다는 반증이기도하다.

사실 우리 ‘인간’은 태어날 때 어떤 목적과 상관없이 그냥 세상에 내던져졌다. 그저 목적 없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이와 같은 비극적인 출생(?)의 허무를 깨닫는 바로 그 순간, 역설적으로 인간은 비로소 진정한 ‘자유의지’를 펼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톱이나 의자의 본질과는 달리, 태어날 때 부여받은 책무가 없으니 성장하면서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가야하는 존재다. 이처럼 ‘실존’이란 인간의 무한한 선택의 자유와 자유의지를 뜻한다.

의자나 톱의 입장에서 본다면 무한정 주어진 선택의 자유가 부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결정하고 책임져야 하기에 늘 고뇌하고 불안에 휩싸이기 일쑤다.

그래서 자신의 자유를 스스로 포기하려 들기도 한다.

경찰이나 군인은 국가가 부여한 역할에만 안주하며, 무한한 자유의지에서 벗어나려 한다. 종교인은 종교가 계시하는 의미만을 쫓음으로써 자유의지에 바탕한 실존적 삶에서 벗어나려 한다.

사르트르는 이것을 언필칭 ‘자기 기만’이라 부르며, 양심에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속이는 일로 간주했다. 떠맡음과 책임지기를 통해서 자유를 회피하는 행동과 다름 아니다. 무한한 자유가 행복을 담보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다시 들여다 보자.

이라크 전을 수행하던 미군장교가 있었다. 특수부대원들을 이끌고 테러범의 소굴을 소탕하러 작전수행에 나섰다. 가는 도중에 들판에서 양치기 소년 세 명을 만나게 된다. 평범하고 순박한 양치기였고 무장도 하지 않았다. 장교는 고민에 빠진다. 만약 살려서 돌려보내 주면 자신들의 위치가 발각될 위험이 있다. 그렇다고 죽이자니 아무 잘못도 없는 민간인을 학살하는 꼴이 된다. 죽여야 할 것인가, 살려주어야 할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 제도나 윤리가 만들어 놓은 ‘인간의 본질’은 무엇인가. 아무 잘못도 없는 사람을 죽이는 건 옳지 않은 것일까? 작전 수행을 위해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가는 것이 옳은 것인가?

갈등하던 장교는 윤리가 만들어 놓은 본질에 의거해 이들을 살려 주게 된다. 본질이 실질을 앞서는 바로 그 순간이다.

그 후 자신들의 이동경로가 양치기에 의해서 테러범에게 알려 짐으로써 그 장교는 휘하의 16명 부하 병사를 잃게 된다. 장교는 이후 3명의 양치기를 살려둔 것을 후회한다. 앞으로 똑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면 절대로 살려서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스스로 다짐한다. 이 다짐이야 말로 실존이 본질을 앞서는 바로 그 순간이다.

‘인간’에게는 이처럼 시대나 장소, 상황에 따라 ‘본질’을 규정하는 보편적 원리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사물’의 경우에 한번 본질이 정해지면 바뀌지 않는다. 칼의 본질이 어떤 경우든 바뀌지 않듯이 말이다. 하지만 인간은 제도나 윤리에 의해서 만들어 놓은 ‘본질’에 따라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선택하거나 결정하니 늘 불안하고 불완전하다.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따라 자신의 ‘본질’이 순간순간 규정되니 말이다.

인간은 수많은 선택의 기로에서 ‘주체적인 실존’을 잃고 ‘주변이 만들어 놓은 본질’을 쫓은 경우를 많이 본다.

좋고 나쁨의 개념을 미리 정해놓고 실존을 바로 보지 못한 채 부화뇌동(附和雷同)하는 오늘날 한국의 정치판이 대표적이다. 그 판에서는 ‘상대를 철저히 짓밟아 죽이기’가 목표다. 미래가 참으로 암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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