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초를 잘라라”… 장성군수의 삭발식
“무명초를 잘라라”… 장성군수의 삭발식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1.12.06 10:36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가에서 무명(無明)이란 말은 ‘세상을 괴롭다고 인식하여 번뇌하게 만드는 마음’을 일컫는다.

불가에서는 머리카락이 그런 번뇌의 원인인 무명을 키우는 ‘세속적 욕망의 상징’이라고 해서 머리카락을 무명초(無明草)라고 한다.

삭발식(削髮式)은 무명이라는 근본적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명초를 잘라내는 의식이다. 승려가 되기 위한 최초의 득도식(得度式)이 삭발식이다.

삭발은 곧 출가수행자의 증표로서 ‘세속적 번뇌와 단절’을 선언하고 구도의 대열에 동참한다는 출가자의 상징이자 청정수행의 의지의 표현이다. 이제까지의 자신을 버리고 불문(佛門)에 들어가 온갖 아집과 교만, 유혹의 감정을 끊고 깨달음을 얻어 널리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서원의 표시이기도 하다.

때문에 삭발을 단행하는 모든 의식에는 간절함과 비장함이 녹아있다.

이같은 종교적 삭발과 달리 우리 조상들은 머리카락을 대단히 신성시했다.

공자가 펴낸 효경(孝經)에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 受之父母)라 하여 “사람의 신체와 터럭과 살갗은 부모에게서 받은 것이니, 이것을 손상시키지 않는 것이 효의 시작이다”라고 한데서 비롯됐다. 어떤 경우라도 머리카락을 손상시켜선 안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이제 시대를 달리해 삭발의식이 결연한 의지의 상징으로, 때로는 죽음까지도 불사하겠다는 저항과 투쟁의 몸짓으로 우리 앞에 나타나곤 한다.

각종 집회현장이나 항의 농성 현장, 스포츠 선수들의 결단식, 정치인의 강렬한 의지표현 등에 삭발이 이어진다. 숙연함과 진정성이 가장 절실히 표현되는 퍼포먼스이기 때문이다.

지난주 장성에서부터 어느 지역에서도 보기 어려운 군민 삭발식이 줄을 잇고 있다.

국립심뇌혈관센터의 장성 설립을 촉구하는 군민분노의 분출이었다. 그 삭발식 현장은 대통령이 집무하는 청와대였고 시발은 현직 자치단체장인 유두석 군수였다.

“그동안 국립기관 유치를 위해 피땀 흘리며 수없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왔다. 그렇게 해서 정부가 국정과제로 채택하고 예산까지 수립했는데도 불용처리 한다니 억장이 무너지지 않을 수 없다.”

유 군수는 삭발에 임하는 결연한 의지를 이렇게 표현했다.

“국립심뇌혈관센터 유치 과정을 두고 일부에서 말을 만들고 그로인해 재판을 받으면서도 이렇게 분통하지는 않았다. 장성에 반드시 설립해 백년먹거리로 만들면 될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좌절된다는 것은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었다”고 말했다.

청와대 앞에서 머리카락을 잘라내는 시골 군수의 눈물은 한 사람의 눈물이 아니라 5만 군민의 염원이기도 했다. 그날 군수의 삭발은 파장을 일으켜 동행했던 상경 인사들의 동반 삭발로 이어졌다.

심민섭 군의원은 “국립기관 유치는 장성군의 일이기도 하지만 우리 남면의 삶의 질과 행정적 위상을 한층 높이는 사활이 걸린 일이다. 어떤 경우라도 국립심뇌혈관센터는 우리 장성에 설립돼야 한다”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날 상경 동반삭발을 감행한 김수권 자유총연맹장성군지회장과 박래섭 자유총연맹장성군지회 협의회장도 청와대를 향한 저항의 몸짓을 멈추지 않았다.

의기로운 5만 장성군민들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동참 의사를 표하며 지속적으로 실행방법을 타진하고 있다. 마침내 30일에는 장성군체육회 관계자들이 청와대에 올라가 국립심뇌혈관센터 설립을 재차 촉구하고 6명이 단체 삭발을 감행했다.

이런 5만 군민의 외침을 청와대가 귀담아 들은 것인가?

정부가 2022년 국정운영에 국립심뇌혈관센터 장성 설립을 구체적으로 못 박고 대폭 확대된 예산을 반영키로 했다는 소식이다. 천만 다행이다.

군주민수(君舟民水)라 했다. 배는 물에 띄워 지지만 물에 의해 뒤집어 질 수도 있다. ‘백성이 분노하면 임금도 뒤집을 수 있다’는 말이다.

군민의 피맺힌 염원이 더 이상 번복하지 않기를 바란다.

 

/백형모 편집국장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