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서도인 우계 유백준
진정한 서도인 우계 유백준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2.02.1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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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피는 봄날, 도화원에서 박주산채가 그리운 특별한 書道人

4년 전, 장성 서삼면 용흥리에 귀촌하여 문불여장성을 노래

40년 경찰 공직 끝내고 서도인으로 인생 재점화 [서집 출간]
40년 서도인의 길을 집대성한 [우계 유백준 서집]을 펴낸 우계 선생. 지금도 틈만 나면 붓을 들고 법고창신의 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40년 서도인의 길을 집대성한 [우계 유백준 서집]을 펴낸 우계 선생. 지금도 틈만 나면 붓을 들고 법고창신의 도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말은 인격이다.

글은 마음이다.

그렇다면 이 둘을 합친 서예는?

서예는 풍격으로 말하게 되는데 작자의 사승(師承)과 가학(家學), 개성, 기질, 그리고 문예의 소양과 심미관, 인품 등 정신면모를 종합적으로 담아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여 ‘품격은 그 사람, 곧 풍격즉인(風格卽人)’이라고 했다.

서법에 독보적 지위를 확립한 호남 출신 서예가 고 학정 이돈흥이 이렇게 표현한 제자가 있으니 바로 우계 유백준(66) 선생이다.

평생을 경찰공무원으로 재직하다 2016년에 퇴직, 2018년에 장성군 서삼면 용흥리에 터를 잡고 장성 사람이 됐다. 낮에는 광주 광산구의 우계서예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녁에는 장성에 돌아와 꿈에 그리던 전원 생활을 즐긴다. 평생 동반자로 살아온 부인이 그토록 원하던 향리에 누옥을 지어 낙원이라고 여기며 즐거운 안식처로 일삼는다.

스스로 표현한대로 본다면 유붕자원방래 불역열호아(유붕자원방래 불역열호아), 즉 원근에서 벗들이 찾아오면 인근 서원사우를 찾아 돌아보고 황룡강변 월광 가득한 누옥에서 박주산채로 밤새 주거니 받거니 담소로 일상을 마무리하는 사람이다.

그러면서 말한다. “비록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전라도가 다 고향이려니 장성으로 온 것이 즐거운 귀거래(歸去來: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는가?”

5세기 중국 송나라 도연명은 불합리한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고 자진해서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귀거래사를 지었다. “돌아가련다. 전원이 거칠어지려는데 어찌 아니 돌아갈소냐”라며 초연하고도 굳은 지조를 읊으며 평소 꿈꾸던 전원으로 향했다. 이 때 지은 유명한 작품이 바로 지상낙원을 일컫는 도화원기(桃花源記)다.

그런데 21세기에 도화원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뒤에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서집(書集)을 펴낸 이가 있으니 바로 우계 유백준(愚溪 兪白濬)이다.

우계는 자신을 찾아온 후학들에게 반가이 맞고 언제나 괜찮은 가르침으로 준다. 스승인 학정 이돈흥으로부터 “끝없는 인격 수양”의 가르침을 받았던 터이다.
우계는 자신을 찾아온 후학들에게 반가이 맞고 언제나 괜찮은 가르침으로 준다. 스승인 학정 이돈흥으로부터 “끝없는 인격 수양”의 가르침을 받았던 터이다.

숙흥야매로 스승 학정을 배우다

우계는 태생이 나주 영산포다. 어려서부터 부유한 집에서 자란 탓에 부친이 그를 서당에 보낸 것이 평생 붓과 인연을 맺은 동기였다. 22살에 군 제대 후 경찰공무원이 됐으나 학업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 방송통신대학 법학과에 입학하여 법학을 전공했다. 그 뒤 2006년에 조선대 정책대학원에 입학, 법무행정학으로 석사를 취득하고 이어 2008년에 동 대학원에서 법학박사를 취득했다. 이런 노력으로 호남대학과 전남도립대학에서 경찰학과 강사로 유명세를 날리기도 했다.

우계 스스로가 말한 숙흥야매(夙興夜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들어 부모님을 욕보이지 않는다’는 시경의 구절을 절대로 놓지 않았다. 법학공부도 끝까지 가고 서예 인생도 그랬다.

무엇이든지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려는 그의 성품은 스포츠 광이란 점에서도 드러난다. 유도 유단자는 물론 복싱에서는 전남대표로 활동했다. 마라톤은 한 때 그의 강인한 체력의 상징이었다. 하프코스를 밥 먹 듯이 달렸고 풀코스 완주도 여러 번이었다.

하지만 어렸을 적부터 눈에 익고 가까이 가봤던 서예와 한학에 대한 애착은 그의 뇌리에서 멀리 있지 않았다.

경남 창원에서 경찰 생활 시작 6년 째부터 서예를 시작, 전남경찰청으로 온 뒤 87년에 광주 동구의 학정서예원에서 학정 이돈흥 선생(2020년 작고)으로부터 본격적인 서예 사사를 시작했다. 그 뒤부터 스승 학정과 우계는 일제강점기와 맞먹는 36년 여의 세월 동안 한치도 흐트러짐 없는 사제의 길을 걸어왔다. 스승의 임종을 지켜본 마지막 제자이기도하고 며칠 전 스승의 2주기 추모를 소리없이 치른 장본인이기도 하다.

우계의 일상 절반은 경찰, 절반은 서도의 길이었다. 하루 한번이라도 붓을 잡지 않으면 몸이 가려울 정도였으며, 한번 붓을 잡으면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신념으로 매진하고, ‘쓸수록 는다’는 스승의 가르침을 한시도 멀리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서예대전을 비롯 각종 서예, 서화대전에서 대상과 특선을 받을 때마다 언론은 그를 ‘낮엔 민중의 지팡이, 밤엔 서예가’라는 수식어를 달아주며 대서특필했다.

그 결과 전국의 유수의 대회에서 추천 작가, 초대 작가로 위치를 굳혔고,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심사위원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 전라남도미술대전, 광주광역시미술대전, 소치미술대전 등에서 심사위원을 도맡을 정도로 실력을 과시했다.

그러다가 그동안 혼을 담은 작품을 모아 최근에는 <우계 유백준 서집>이라는 250쪽 짜리 서집을 펴내 보기 어려운 교본을 선물했다. 이 서집을 중국 지인들과 서도인들이 400여 권 보내달라고 할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우계의 서집에서 발췌했다. ‘백인가중 화기자생’이라, ‘잘 참는 가정에는 화목한 기운이 절로 생긴다’는 교훈이다. 한자도 틀림없는 진리다.
우계의 서집에서 발췌했다. ‘백인가중 화기자생’이라, ‘잘 참는 가정에는 화목한 기운이 절로 생긴다’는 교훈이다. 한자도 틀림없는 진리다.

 

이제는 도화원에서 더 즐거운 사람

우계는 제자 양성과 돌봄의 길에 확연한 서도정신을 추구한다. 옛 선인들처럼 그렇게까지 늠름하진 못하더라도 이 시대에 보기 어려운 서도 외길이다. 신념은 하나다. 학정 스승으로부터 배운 법고창신(法古創新:옛것을 본받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의 정신이다.

<눈길을 걸을 때/ 흐트러지게 걷지 마라/ 내가 걷는 발자국이/ 뒤에 오는 이의 길잡이가 될 것이니...>라는 서산대사의 훈계가 늘 마음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은 컴퓨터가 학문과 예술을 지배하고 전통이 자리를 떠밀리면서 서예인들이나 서법이 설곳을 잃었죠. 그래도 우리 전통예술의 가치를 추구하고 이어가려는 뜻있는 사람들이 서예원을 찾고 있어 행복할 뿐입니다”

하지만 전통을 잃어버린다면 그 민족의 정체성을 어디서 찾을 것이냐는 자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문불여장성의 장성에서도 기회만 있다면 어느 곳이나 마다않고 사람을 그리워하며 붓을 들겠다는 소신이다. 지금은 장성군청 공무원들에게 매주 월요일 일과가 끝난 뒤 서예지도를 하고 있다.

“장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엄청난 이름을 가진 곳일 겁니다. 용이 황제의 상징인데 그 용의 우두머리인 황룡이 휘감고 있으니 말입니다.”

산 지가 얼마나 됐다고 장성 자랑으로 일관하는 그의 호방함에 꽃피는 봄날의 박주산채가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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