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장성향교에 유림항일사적비 제막식
기획특집/장성향교에 유림항일사적비 제막식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2.10.31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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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향교가 없었더라면 한말 구국의병운동이 그렇게 불타오를 수 없었다”

28일 장성향교, 유림항일사적비 제막식 ‘의병의 고장’ 명성 재확인

김영풍 전교 ‘유림의병사 정리복원’ 약속...자료관.유물관 등 시급 주장
장성향교 입구에 유림항일사적비가 우뚝 세워졌다. 28일 오전 12시 제막식을 가진 이 자리에는 전남 유림 관계자들과 항일의병 후손 유족들, 향교 장의 등 100여 명이 참석했다. 이 사적비에는 장성을 중심으로 전개된 항일운동의 전개와 의의를 전후좌면에 새겼다.

한말 무자비한 일제 만행에 분연히 떨치며 일어섰던 장성향교의 항일의병운동 역사를 길이 남길 ‘유림항일사적비’가 세워졌다.

22년 10월 28일 오전 11시, 장성 향교 입구 비림 끝자락에 세워진 항일사적비는 장성의 의병사를 비문에 영구히 새긴 또 하나의 유산을 만들어 냈다.

이날 제막식을 주관한 김영풍 장성향교 전교는 “장성 정신의 상징물이 세워졌다. 장성이 왜 의향이고 장성 정신이 왜 위대한 지를 말해주는 배움터가 될 것으로 믿는다”고 그 가치를 평가했다.

김 전교는 “장성향교는 전국 어느 향교보다 앞장서서 더 맹렬히 항일운동에 나섰으나 아직 그 유적지 조사와 자료조사와 유족 찾기 등의 문제가 미완의 문제로 남아있다. 비록 늦었지만 자료 조사작업에 이어 유물관이나 자료관 건립 등 본격적인 후속 작업이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설립된 유림항일사적비는 ▲올 4월 1일 김영풍 장성향교전교가 취임식을 갖는 자리에서 유림항일사적 복원사업을 거론한 뒤 ▲5월 6일 유림총회에서 사적비 건립안 승인 ▲7월 14일 모금 시작 ▲7월 22일 문영수 전 전교를 추진위원장 추대 ▲8월 26일 비문안 완료 등의 과정을 거쳐 개막하게 됐다.

사적비 건립을 위한 헌성비는 김영풍 전교 3백만원과 문영수 추진위원장 5백만 원을 비롯 박래호 장성유도회장 2백50만 원, 기인서 송사 기우만 종손 1백만 원, 기동서·기영숙 성재 기삼연 의병대장 현손 1백만 원, 이백오 월암 이기창 손자 2백만 원, 공재경 장성향교 부전교 1백만 원, 양회택 장성향교 수석장의 1백만 원, 그리고 각 읍면의 뜻있는 후원자 20여 명의 희사로 이뤄졌다.

송사 기우만의 거병 격문이 시발...호남향교에 불을 붙였다

성재 기삼연 대장의 호남창의회맹소 ‘장성 창의정신의 표본’

자료에 따르면 한말 제1차 의병은 1895년 국모 시해사건(을미사변)과 일제의 단발령 조치로 전국에서 불꽃처럼 일어나는데 호남에서는 노사 선생 문하인 장성의 송사 기우만(1486~1916), 성재 기삼연(1851~1908)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의병운동의 선봉은 송사 기우만 선생의 격문에서부터 시작된다. 격문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해있는 임금을 궁중으로 모셔오고 친일파들을 토벌하자고 단호하게 역설한다.

기우만은 노사의 친손자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장성향교에서 유림들을 모아 호남 각 고을에 격문을 돌리고 이에 각 지역 향교가 호응하자 광주 광산관(光山館)에 의병청인 호남대의소(湖南大義所)를 세운다. 이 때 맨 먼저 장성의 기삼연이 장성향교를 중심으로 모은 의병 300을 거느리고 합세하여 군무를 맡았다. 기삼연은 백마를 타고 왕래하면서 군무를 도와 백마장군으로 불렸다. 기우만을 호남대의소 대장으로 추대한 것도 기삼연의 적극적인 활동과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장성향교에서 시작된 유림의병운동은 광주향교로 본부를 옮기면서 호남 유림의병운동의 본산이 됐다.

기삼연은 뒤이어 의병 활동을 계속하는데 1907년 장성 황룡의 수연산 석수암이라는 암자에 의병 연합부대인 호남창의회맹소를 설치, 의병운동의 제1대 사령관이 되어 영광, 장성, 고창 등지에서 일경과 전투를 벌여 혁혁한 전과를 세우다 체포되어 무등산 광주천변에서 처형당하는 비극을 맞는다.

일제는 1906년∼1909년 호남지역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의병장으로 최익현·고광순(高光洵)·기삼연·김준·김율(金聿)·전해산·심남일·안규홍(安圭洪) 등을 지목했다.

이들 가운데 기삼연, 김준, 김율, 전해산, 심남일 등은 모두 호남창의회맹소에 참여한 의병장들이었다.

따라서 장성에 설립된 호남창의회맹소는 호남지역 의병봉기에 매우 큰 영향을 주면서 1907∼1909년 이 지역이 의병항쟁의 중심무대로 떠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세력으로 평가된다.

이렇게 장성향교를 중심으로 한 유림의병운동은 호남 유림의병운동의 시발점이 되면서 전국 항일운동 불꽃을 더욱 지피는 계기가 됐다.

유림 사적비를 세우게 된 배경과 과정을 설명하는 김영풍 장성향교 전교.
앞으로 항일 현장 답사와 발굴에 이어 전국 역사유물관이나 서고, 일제 재판기록, 유가족 기록 등 관련 자료 조사 및 사료 찾기 작업 등이 하루속히 뒤따라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일제가 기록한 ‘전남폭도사’는 장성의병운동을 어떻게 기록했나?

“가장 유생이 많고 완고한 자가 모인 장성군”...저항의 진원지 실토

한말 의병운동의 기록은 그것을 진압하고 처벌했던 일제의 ‘전남폭도사’에 자세히 기록돼있다.

일제는 장성을 ‘가장 유생이 많고 완고한 자가 모여 있는 장성군’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역으로 생각하면 ‘어느 고을보다 의기가 넘치는 선비들이 많은 곳’이라는 뜻이 된다. 그만큼 장성은 배일(排日)의 저항 세력이 강했다고 말할 수 있다.

폭도사의 장성 기록을 살펴보자.

“광무 10년(1906) 유생 최익현이 격문을 돌려 배일 기세를 선동함으로써 전라도에 폭도봉기의 징후가 나타났다. 맨 처음 도내에서 가장 유생이 많고 완고한 자가 모여 있는 장성부의 곽한풍 외에 7명이 호응, 은밀히 총기를 모으고 또 수십 명의 마을주민을 모아 야간에 때때로 회합하여 총기와 죽창 조련을 하고 있다는 설이 있어 경찰 11명을 파견, 수사한 결과 장성 유생들의 이 같은 사실을 확인했다. 우두머리격인 곽한풍 김익중 송영신 3명을 군아(郡衙)에 억류하는 한편 총포 17, 군도 2, 죽창 300 및 대나무 끝에 칼을 꽂은 것 106점을 압수하여 이를 깨트려 군수에게 보관시키고 동 3명을 취조함에 폭도 사실을 발견할 수 없음으로 그대로 돌려 보냈는데 이 때 벌써 이면에서는 비상한 세력으로 배일적 폭동의 기운이 조성되고 있었다.”

일제는 유림들이 가장 많은 장성향교를 중심으로 항일 운동의 기운이 싹트고 있었다고 실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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