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의병사 재조명] 김경수.변윤중.윤진과 가족들
[장성의병사 재조명] 김경수.변윤중.윤진과 가족들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2.12.05 11:2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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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며 의를 얻었다"

의병 연구가 김남철 선생 ‘남도 임진의병의 기억을 걷다’ 발간 화제

장성 창의 정신의 발자취 추적...‘장성 정체성 찾기 너무 소홀’ 지적

 

겨울 찬바람이 매섭다.

이런 혹한의 눈보라를 뚫고 한뼘한뼘 이어온 역사가 있다.

바로 이름없는 민초들의 저항 역사다.

민초가 써내려 온 역사는 설움이 한 아름, 의기가 한 아름이다.

이름없는 사람들의 흔적 가운데 나라가 위급에 처했을 때 분연히 떨치고 일어선 의병들의 이야기는 특히나 한이 서려 있다.

이유야 어찌됐던 나라가 책임져야할 백성의 안위를 나라가 해결하지 못해 그들과 가족들이 목숨을 걸고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한국 의병사를 다루려면 남도 의병을 알아야 하고, 남도 의병사를 다루려면 장성 의병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은 의병사의 불문률이다. 장성이 왜 창의의 고장이고 장성 정신이 왜 불멸의 기상인가를 말해주는 실증들이다.

이런 가운데 장성 의병사를 깊이 있게 다룬 책이 발간되어 눈길을 끈다.

교사 출신인 김남철 씨가 최근 펴낸 <남도 임진의병의 기억을 걷다>라는 책이다. ‘의롭고 당당한 삶으로 겨레의 별이 된 사람들’이란 부제를 달았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남도 곳곳에 널부러진 의병의 흔적을 발로 찾아다니며 한자 한자 새긴 발자국의 결과물이다.

저자는 서두에 “남도 곳곳에서 의병들이 들불처럼 일어섰고 죽어갔다. 무심코 지나친 비석하나, 아무도 찾지 않는 사우, 먼지 쌓인 자료는 이름 없이 죽어간 의병들의 넋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런데 외면 받고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라고 심경을 적었다.

이 책은 광주전남의 17개 지역 의병사를 다루면서 가장 돋보이는 인물들을 배출한 곳으로 장성을 꼽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장성에서는 3번씩이나 엄청난 저항을 보인 의병창의가 있었던 지역임을 상기했다.

1차 의병은 오천 김경수가 고경명 장군이 금산전투에서 숨졌다는 소식에 분개해 1592년 장성 남문에 의병청을 설치하고 1620명의 의병을 모아 일으킨다.

2차 의병은 1593년으로 김경수를 중심으로 의병 836명과 군량미 692석을 모아 거병한다. 당시 늙고 병든 김경수를 대신해 두 아들이 의병을 이끌고 진주로 가서 고경명 장군의 아들 고종후의 의병과 합세해 10만 왜군을 맞아 두 아들이 장렬하게 전사했다.

3차 의병은 1597년 정유재란 때인데 남원성이 왜군에게 함락되자 김경수가 이번에는 사촌 동생 김신남에게 의병장을 요청해 장성 인근에서 모집한 620명을 이끌고 경기도 안성 전투에 참가해 큰 전과를 올리게 된다.

김경수의 창의격문 “뜻있는 선비에게 고하노라”

이들 세 번의 창의를 모두 김경수가 주도하는데 그가 의병을 모을 때 썼던 격문은 민초들의 심금을 울리는 명문장으로 꼽힌다.

“아! 이 못난 늙은이가 삼가 뜻있는 선비들에게 고하노라. 지팡이에 의지하여 북녘하늘을 우러르니 슬프도다. (중략) 내 몸은 비록 늙었으나 말에 오르니 힘이 솟고 분한 마음에 적개심이 불타오른다. 각 고을의 선비 호걸들이시여, 장성현 남문 의병청에 모이시라. 우리 장정들이 구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진격하면 뒤따르는 자 구름같이 모일 것이요, 군량미는 산더미처럼 거둬지리라. 우리 모두 통분의 눈물을 뿌리며 죽음으로 나아갈진 데 반드시 대첩을 거두리라. 왜적을 섬멸하여 창해에 칼을 씻고 한성을 수복하는 공을 세워 국은에 보답하고 청사에 길이 공훈을 새길진저!”

구국의 비장함으로 분루를 솟구치게 만드는 이 격문의 효과로 수천의 의병이 모였고 김경수는 남문창의의 맹주가 되어 왜구와의 전투에서 장성인의 기개를 한껏 드높인다.

변이중의 사촌 변윤중 가족의 초개 정신

저자가 또 하나의 사례로 꼽는 것은 망암 변이중의 사촌 동생 변윤중 집안의 의병활동이다.

변이중은 임진전쟁 당시 300량의 화차를 제작했는데 이는 장성의 만석꾼이었던 사촌동생 변윤중의 전폭적인 지원 때문이었다.

역사는 화차를 발명했다는 변이중을 주목하지만 변윤중은 외면하고 있다.

변윤중은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하인들과 장정 200여 명을 이끌고 장성 장안리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1만 명의 훈련된 왜군을 상대하기는 불가능했다. 장정들을 잃은 그는 패색이 짙자 “나 혼자 사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라며 싸움터였던 부엉이 바위로 올라가 황룡강에 몸을 던져 순절했다. 그의 아내 함풍 이씨도 “남편이 죽었는데 나 혼자 살아 무엇하랴”면서 그 자리에서 강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이에 아들 변형윤도 부모를 따르려하자 부인 장성 서씨는 “당신이 죽으면 손이 끊어질 것이니 내가 대신 목숨을 바치겠소”라며 시부모를 따라 강물에 몸을 던졌다.

참으로 가상하고 강직한 의절의 표상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봉암서원 근처에는 변윤중 집안의 의로움을 기리는 삼강정려각이 있다.

부부가 절의를 다한 윤진 장군의 입암산성 항쟁

저자는 장성 창의정신을 돋보이게 하는 또한 사람을 지목한다.

김경수와 함께 1차 창의 때 남문창의를 주도한 윤진 장군과 그 휘하의 의병사들의 이야기다. 윤진 장군이 호남의 관문인 입암산성을 지키며 부부가 절의를 다한 행보는 가히 애처롭다 할만하다.

윤진은 1592년 7월 김경수, 기효간과 남문창의를 주도하고 격문을 작성했다. 그는 11월 10일 의사 38인, 집안 하인 8명, 군량 31섬을 가지고 와서 창의에 참여했다.

윤진은 장성의병으로 활동하면서 전라도로 들어가는 요충지인 입암산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전라도 관찰사에게 성을 고쳐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면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성을 고쳐 창고를 쌓고 대포를 쏘기 위한 포루를 만들었다.

그 뒤 1597년 일본군이 쳐들어오자 의병 대다수가 흩어졌지만 윤진은 끝까지 맞서 싸웠다. 하지만 결국 성은 무너졌고 윤진은 칼에 목이 찔렸으나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끝까지 싸우다가 순절했다.

이 소식을 들은 부인 권씨도 정절을 지키기 위해 은장도로 목숨을 끊어 남편을 따랐다. 윤진의 아들은 당시 17세였으나 적의 칼에 찔려 절벽에 떨어지는 바람에 다행히 목숨을 건진다.

이분들을 기리는 북하면 입암산성 안의 윤진 순의비에는 ‘부부 함께 죽어 둘다 절의를 이룬 것은 참으로 천년에 한번 있을까 말까 한 일이요, 백세를 내려가도 감동할 일’이라고 새겨져 있다.

저자는 “우리는 윤진 장군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반문해야 한다”고 항변하고 있다. 이 같은 역사와 행적은 북이면 면사무소 부근에 위치한 ‘호남오산남문창의비’에 남아 있다.

저자는 이렇게 외치고 있다.

“김경수, 기효간, 그리고 윤진 의병장. 국난 극복에 죽음으로 맞선 진정한 애국자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기억하지 못하고 이름조차 모르고 있다. 이제라도 기억하고 그들과 마주해야 한다. 그래야 민족정기가 바로서지 않을까.”

 

저 남쪽 땅을 봐라

바위가 있으니 높고 높도다

지아비는 충의에 있고

지어미는 절개에 죽었도다

한 몸 되어 살신성인하니

만고에 어울려 열렬하도다

바위가 갈라지지 않는 것처럼

이름이 그처럼 없어지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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