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100년 전이니 일본을 용서하라고?
[편집국 칼럼] 100년 전이니 일본을 용서하라고?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3.04.28 18: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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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피눈물은 어떡하고?”

4월 30일, 역사 속에서 찾은 이날의 기억은 조선 역사에서 가장 수치스런 날이다. 나라와 백성을 보전해야 할 왕이 그 책무를 다하지 못하면 어떤 모습으로 추락하는 지, 새삼 일깨워 주기 때문이다.

임진년인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은 16만 명의 무장병사를 앞세워 조선 침략을 강행한다. 그 위세에 눌린 장수와 병사들은 아예 싸워볼 생각도 못하고 달아나기에 바빴다. 왜군 선봉장은 하루만에 부산진성과 그 옆의 동래성을 함락시키고 불과 12일 만에 경상도를 수중에 넣었다. 조선 장수 중에 가장 명성이 높았던 신립 장군이 8천 여명의 군대를 끌어 모아 왜군이 한양으로 들어가는 중간 지점인 충주 탄금대에서 맞섰으나 제대로 한 합도 겨뤄보지도 못하고 전멸했다.

당시 조선의 모든 병력이 고작 5만 명인데 전투경험은 물론, 훈련 한번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들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공포적 존재감을 주는, 듣도 보도 못한 최신식 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정예병사 16만 명이 몰려왔으니 어찌 상대가 되겠는가.

당시 일본은 영주들 사이에 영토분쟁으로 싸움이 그칠날이 없던 100년 동안 전국시대를 토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통일하고 그 전투경험을 토대로 침략야욕을 감행한 것이기에 조선군은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이렇게 왜군이 파죽지세로 한양 턱 밑까지 올라오자 1592년 4월 30일 선조는 파천(播遷:임금이 도성을 떠나 다른 곳으로 피란하는 일)을 시도한다. 말이 파천이지 야반도주나 마찬가지였다. 그러자 왕의 파천을 두고 신하들 간에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종묘사직이 있는 도성을 버리고 어떻게 떠날 수 있느냐는 주장과 일단 피한 뒤에 각 고을의 원군을 기대하여 다시 국토를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팽히 맞선 것이다.

우승지 신잡은 이렇게 말했다.

“전하께서 만일 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시고 끝내 파천하신다면 신의 집에는 팔순 노모가 계시니 신은 종묘의 대문 밖에서 스스로 자결할지언정 감히 전하의 뒤를 따르지 못하겠습니다.”

수찬 박동현도 파천을 반대하며 아뢴다.

“전하께서 지금 도성을 나가시면 인심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전하의 연(輦:가마)을 맨 인부도 길모퉁이에 연을 버려둔 채 달아날 것입니다.”

그런 와중에 영의정 이산해가 “옛날에도 피난한 사례가 있사옵니다 전하”라고 흐르끼며 고하자 왕은 목숨을 보전코자 피란을 택했다.

유성룡의 징비록을 보면 선조의 피란길은 눈 뜨고 볼 수 없는 목불인견이었다.

선조가 경기도 벽제~혜음령 일대를 지날 때 밭을 갈던 백성이 “나랏님이 백성을 버리면 누굴 믿고 살라는 것입니까”라며 대성통곡하는 소리를 듣는다.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선조 일행이 임진나루에 닿았을 때 파주 목사가 음식을 준비했는데 하루 종일 굶었던 호위병들이 임금에게 바칠 수라를 닥치는 대로 먹어 치우는 사건도 발생했다. 임금의 행적을 끝까지 기록해야 하는 사관들마저 다 도망가고 평양까지의 피란길을 끝까지 수행한 사람들은 겨우 17명에 불과했다.

이렇게 찢긴 산하에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조정에서 산하들 사이엔 정세판단을 두고 내편, 니편으로 나뉘어 상대를 음해하여 파직하거나 귀양 보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징비록의 기록을 보자. 문관 출신 엉터리 지휘관인 김명원의 한강 전투 명령을 거부하고 양주 산골짜기로 들어간 부원수 신각은 왜군 60여 명을 베었다. 그런데 김명원은 신각이 배신하고 도망쳤다고 보고했다. 평양에 머물던 조정은 선전관(왕명을 하달하는 신하)을 시켜 전투에 참전하러 연천(한탄강)에 와 있던 신각을 사형에 처하도록 했다. 그런데 선전관이 명을 받들고 연천으로 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신각이 양주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보고가 평양에 올라왔다. 이에 조정은 다시 사형을 중지시키기 위해 급히 또 선전관을 보냈다. 하지만 선전관이 연천에 도착했을 때는 신각의 목은 이미 나뭇가지에 걸린 뒤였다. 신각에게 구십이 된 노모가 홀로 계셨다는데 얼마나 비극이었겠는가.

치욕의 역사가 또다시 재연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겐 미래도 보장할 수 없다. 그런데도 자꾸 역사를 망각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있다. 이 나라의 통수권자다.

윤석열 대통령은 방일을 앞두고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100년 전 우리 역사 때문에 일본이 무릎을 꿇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이뿐 아니다. “옳습니다, 전하”하며 권력에 빌붙어 용비어천가를 되뇌는 권신들도 즐비하다.

전범 국가 일본의 야욕과 만행이 500년 전 임진왜란이나 100년 전 일제강점기나 변함없는데 덮어두라니, 오호통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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