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성주괴공(成住壞空)...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편집국 칼럼] 성주괴공(成住壞空)...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3.06.26 10:33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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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인가?

그리고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생각할 줄 아는 동물인 인간이 끝없이 고뇌하면서 아직도 정답을 구하지 못한 질문의 하나다.

그것을 푸는 실마리의 하나는 시간이다. 굳이 이름을 붙인다면 봄·여름·가을·겨울.

잎이 부채살처럼 퍼지고 범처럼 얼룩달룩한 꽃잎을 피우는 범부채라는 야생초가 있다. 여름에 피어나지만 범부채는 여름 것만이 아니다.

범부채는 한해에 한 걸음씩 길을 간다

봄내 다리를 키우고

여름내 꽃을 베어물고

가으내 씨를 여물게 한다

겨울이면 마침내 수의를 입고 벌판에 선다

겨우내

숱한 칼바람에 걸음을 익히고

씨방을 열어 꽃씨를 얼린다.

때로 눈을 뒤집어쓴 채 까만 눈망울들 굳세게 한다.

그리하여 입춘 지나 우수 어디쯤

비에 젖으며 바람에 일렁이며

발목에 힘 빼고 몸 풀어

쓰러진다 온몸으로 쓰러진다.

키만큼 한 걸음 옮긴 곳에 머리를 풀고 씨를 묻는다.

안상학 시인이 쓴 「범부채가 길을 가는 법」의 일부다. 시인은 ‘범부채는 한 해에 딱 한 걸음씩 길을 간다’고 마무리했다. 이 무슨 뜻일까.

여러해살이풀인 범부채가 고작 한 해에 한 걸음씩 길을 가기 위한 생존 전략을 보자. 봄에는 우선 흙에 올라서기 위해 다리인 줄기를 키운다. 여름에 꽃피우고 가을에는 씨가 여문다. 겨울이면 씨앗을 둘러쌌던 씨방이 허옇게 바래면서 뒤집어 진다. 이것을 보고 시인은 “마침내 수의를 입고 벌판에 선다”고 했다. ‘수의’에서 죽음을 각오한 결연한 의지가 엿보인다. 칼바람과 눈보라는 꽃씨를 얼리기도 하면서 야물고 굳세게 생명성을 간직하게 해준다. 겨울을 잘 견디어 이른 봄을 지나고 여름이면 피어나 가을 곁에 쓰러진다. 시인은 이 때를 일러 “키만큼 한 걸음 옮긴 곳에 머리를 풀고 씨를 묻는다”고 애석함을 표했다. 죽을 힘을 다하여 견디어 살다가 온몸으로 쓰러지는 삶이 완성된다. 시인은 「범부채가 길을 가는 법」을 통해 우리가 사는 길이 어떤 길이라는 것을 곡진하게 일러준다.

범부채를 접고 이제 우리 안으로 들어가 보자.

우리는 무수한 찰나(刹那)와 억겁(億劫)의 둘레에 쌓여있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을 달, 해, 세기 등으로 나누었다. 하지만 그 나눔은 찰나(刹那)라는 아주 극히 짧은 잠시의 연속일 뿐이다. ‘찰나’는 산스크리트어의 ‘크 샤나’에서 온 말로 ‘생각이 스치는 한 순간’이라는 의미다.

반면, ‘겁’이란 갈파(Kalpa)의 번역으로 겁파(劫波) 또는 갈랍파(羯臘波)라고도 음역한다. ‘겁’은 ‘년,월,일이라는 어떤 시간의 단위로도 계산할 수 없이 무한히 긴 시간’, 즉 ‘하늘과 땅이 한 번 개벽한 때에서부터 다음 개벽할 때까지의 동안’이라는 뜻이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런데 억개나 되는 ‘억겁’은 얼마나 긴 시간을 의미할까?

풀꽃인 범부채가 성장, 결실, 번식하고 사그라들 듯, 생명을 가진 모든 것들은 생기고 머물고 변화하고 소멸한다. 그것을 불가에서는 성주괴공(成住壞空)이라 했다. 만물은 생성되어(生), 존재하다(住), 끝내는 무너져(壞), 없어지는(滅) 것이라고 했다. 또 생주이멸(生住異滅)이라고도 했다. 사물이나 한 생각이 일어나서 머물렀다가 변화해 소멸하는 네 단계 과정인 생(탄생) 주(존속) 이(파괴) 멸(사멸) 그대로의 모습을 말한다. 이 같은 순환을 반복하는 것이 불변의 진리다.

그러니 삶이 곤궁하다해서 결코 두려워하거나 노여워하거나 분노할 일이 아니다. 행복의 꽃도 시들어 멸하게 마련이다. 삶은 희로애락을 짊어지고 한 해 한 걸음씩 가는 범부채에 불과하다.

멸한다는 것은 또 다른 생의 공간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니 멸은 멸이 아니다. 멸은 생이다. 그래서 공즉시색 색즉시공(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 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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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2024-01-21 17:51:21
참 훌륭하고, 아름다운 글 입니다. 성주괴공은 현대물리학의 우주론이 흘러가는 방향과도 다르지 않습니다. 단순히 글쓴이께서 말했듯이 색즉시공 공즉시색 (色卽是空 空卽是色) 의 발현이 성주괴공(成住壞空) 으로 이어지는 현대물리학. 그러나 이러한 불가와 현대물리학을 넘어 범부채의 아름다움과 일생을 알려주신, 글쓴이 혜안과 필재에 박수를 보냅니다. 장성군은 참 훌륭한 기자분을 두었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