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한여름밤의 사색
[편집국 칼럼] 한여름밤의 사색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3.07.17 12:4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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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죽음의 군사와 내일 만나게 될 지 어찌 알겠는가”

지루한 장마 속, 밤하늘에 그 많던 별들도 아예 자취를 감췄다. 잠깐 스친 구름 사이로 별빛이 쉭 지나가니 세상은 또다시 검디검은 암흑이다. 그 사이를 흐르는 것은 오직 적막의 찰나 뿐. 알 수 없는 시간의 화두가 번뇌의 문을 두드린다.

지극히 짧은 순간의 찰나, 그 찰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이 찰나의 시간에 대해 궁금증을 갖고 질문을 던지고 답을 찾고자 했으나 아직도 진행형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시간을 개울의 흐름에 비유해 생각했다. 모든 것은 시간과 더불어 흐른다, 즉 ‘만물은 유전(流轉)한다’는 말을 던지며 시간은 무한한 과거로부터 무한의 미래로 흐르고 있다고 설파했다.

이를 불교식으로 표현하자면 제행무상(諸行無常:우주 만물은 항상 돌고 변하여, 잠시도 한 모양으로 머무르지 않는다), 제법무아(諸法無我: 모든 것이 변화하고 생성 소멸하니 고정된 나도 없다), 오온개공(五蘊皆空: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이 모두 공하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중세 크리스트교 성자로 덕망있는 신부이자 철학자였다. 당시 그 만큼 시간에 대해 깊게 생각한 사람도 없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질문을 받지 않을 때는 시간에 대해 잘 안다. 그런데 ‘시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아무것도 모르게 된다”

그가 던진 이 질문은 시간의 본질을 꿰뚫어 보게 만드는 궤변으로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구약성서의 창세기 즉 모세 제1서 제1장에서부터 제4장 아담과 이브까지는 신의 창조론에 대해 쓰여 있다. 이를 따지는 궤변론자들은 “그렇다면 신이 세계를 만들기 전까지는 무엇을 했지? 낮잠을 잤었나?”라고 물었다. 이에 대해 어떤 이는 “신은 그런 우문을 던지는 자들을 위해 지옥을 만드느라 바빴다”고 답변을 내놓았다.

이러한 말들이 나오는 이유를 분석하자면 현대 물리학이 추구하고 있는 ‘우주팽창설에 기초한 초고온의 시원우주(始原宇宙) 이론’이 떠오른다. ‘우주가 시작될 때 초고온·초밀도의 물질이 있었다’는 이 이론은 ‘신이 우주를 창조했다’는 성서의 내용과 전혀 매치가 되지 않기 때문에 괴변이 속출했다.

불교에서의 시간론은 매우 복잡하지만 이치는 간단하다.

먼저 존재를 불가피하게 변화시키는 힘(力)이 전제된다. 그 힘을 ‘무상(無常)의 힘’이라 일컫는다. 모든 존재는 똑같은 상태에 머물지 못하게 하는 내재적 힘이 있는데 이 내재적 힘의 흐름이 시간이라는 것이 불교의 시간론이다.

시간은 애초부터 흘러왔고 지금도 흐르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는 언제 돌아봐도, 언제 확인해도 언제나 ‘지금’이다. 과거라고 생각되는 것도 우리 기억 속에 ‘지금’으로 남아있다. 또한 현재 남겨진 과거의 흔적 -역사적 사건이나 지층·화석 등-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역사적 사실도 모두 지금에 속해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이 지금은 언제나 우리와 밀착되어 그냥 흘러가지 않는다. 이것을 ‘영원한 지금’이라고 한다. 불교에서 ‘불사(不死)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것은 이 ‘영원한 지금’, 즉 움직이지 않는 현재를 절실하게 이해한 것으로 해석된다.

‘영원한 지금’의 반대말은 ‘시간’이다. 인간이 고뇌와 번민은 이 ‘시간’에 속박되어 있다. 과거의 업(業)과 현재의 번뇌가 우리를 속박하고 괴롭힌다. 근원적 힘인 무상의 힘이 끊임없이 현재를 과거로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법화경의 가르침에 “현재만이 실재하며 과거와 미래는 실체가 없다”는 “현재유체 과미무체(縣宰有體 過未無體)”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일야현자(一夜賢者)의 게송에서는 “과거를 좇지 마라, 미래를 바라지 마라. 과거는 이미 멸했으며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고 이른다.

지나간 것을 좇지 말고 아직 오지 않는 것을 생각하지 말자. 지금 마주하고 있는 일을 면밀히 관찰하고 끝까지 실천하자. 다만 그 수단과 목적이 나 혼자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웃과 더불어 사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선의 실천이다.

깨달은 성자들이 말하지 않았던가. “진실로 저 죽음의 군사와 내일 만나게 될 지 어찌 알겠는가”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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