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감히 한신 장군의 과하지욕(跨下之辱)을 말하다니
[편집국 칼럼] 감히 한신 장군의 과하지욕(跨下之辱)을 말하다니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3.07.24 12: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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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표 대구시장이 과하지욕을 언급했다.

과하지욕(跨下之辱)의 과(跨)는 사타구니를 가리키는데 ‘가랑이 밑으로 기어가는 치욕’이란 말이다.

폭우 도중에 골프를 쳤다는 비난을 받아 소속 정당인 국민의힘 윤리위원회가 징계절차를 개시하자 자신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윤리위 징계를 치욕으로 생각하지 않고 미래 큰 뜻을 위해 참고 견디겠다는 마음을 이렇게 비교했다.

하지만 과하지욕이 어디 그렇게 어쭙잖은 일이던가?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회음후열전에 나오는 이 유명한 고사는 치욕을 어느 만큼 참고, 어떻게 승화해내야 하는가를 말해준다.

한신(韓信 ?~기원전 196)은 어려서 집안이 매우 가난해 끼니조차 제대로 먹을 수 없었다. 향촌의 정장 집에서 밥을 얻어 먹다 쫒겨나 강가에서 빨래를 해주고 살아가는 표씨 아주머니의 집에서 밥을 얻어 비렁뱅이 취급을 받기도 했다. 이 때 표씨 아주머니에게 “나중에 왕이 되면 크게 갚아드리겠다”고 말한 것이 빌미가 되어 훗날 왕이 된 한신이 진짜로 ‘밥 한 그릇을 천금으로 갚았다’는 일반천금(一飯千金)의 고사성어를 낳게 했다.

한신은 덩치는 컸지만 가난함 때문에 언제나 외톨이 신세였다. 마을에서 다른 아이들이 진짜 칼을 차고 다닐 때 그는 허접한 칼이라도 큰 칼을 차고 다녔다. 언젠가 큰일을 이루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동네에서 건달패거리들이 별 볼일 없이 큰 칼만 차고 다니는 한신을 만나자 바보 비렁뱅이라 놀리며 싸움을 걸어왔다. 덤빌 테면 덤비라며 칼싸움을 걸었다. 무기도 시원찮은데 저쪽은 패거리였다. 자칫하면 동네에서 손가락질 받고 밥도 못 얻어먹을 신세가 될 수 있다. 패거리 대장은 한신한테 “허우대만 큰 놈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 칼로 나를 찌르고, 죽기가 두렵거든 내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라”고 길을 막았다.

한신은 분노감에 그를 죽일까 생각했지만 그렇게 되면 평생 살인죄로 썩게 되고 대장부 앞길이 막힐 것 같아 싸움을 구경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이 몰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무릎을 꿇고 가랑이 사이로 기어간다. 그 순간, 한신은 가랑이 사이에서 그들을 힐끔 올려다본다.

사마천은 사기에 이 ‘힐끔’을 표기하면서 “그래 지금은 네 가랑이 사이로 기어가겠노라. 그러나 언젠가는...”이라는 마음 깊숙한 의미심장한 뉘앙스를 남겨 놓고 있다. 그 이후 한신은 평생 동안 그날의 분노에 절치부심, 복수의 칼을 갈고 닦는다.

진나라 말기에 이르러 진시황의 폭정으로 나라가 기울고 난세가 되어 항우가 숙부인 항량과 함께 군사를 일으키자 한신은 항우에게 가담한다. 하지만 미천한 신분 때문에 요직에 등용되지 못하고 밀려난다. 청년시절 시정잡배들의 가랑이 사이로 지나갔다는 말이 나돌아 그를 수치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게다가 거만한 항우는 한신의 존재를 무시했다.

한신은 결국 항우 곁을 떠나 또 다른 세력인 유방의 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서도 인정을 받지 못하고 오히려 군법을 어긴 죄로 목숨을 부지하기 어럽게 되는데 유방의 친구인 하후영의 도움으로 살아난다. 한신의 재능을 알아본 하후영은 그를 승상 소하에게 추천했고 소하가 그의 재능을 인정했다.

소하는 한신을 삼군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군사를 지휘케하는데 조나라와의 싸움에서 불과 2만의 군사로 그 10배인 20만의 조나라 군사를 물리친다. 이 때 전략이 ‘수적인 열세이지만 물을 등지며 죽기 살기를 다하여 싸운다’는 뜻의 배수지진(背水之陣)이라는 전략이었다.

이렇듯 전투 때마다 승승장구한 한신은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하게 되면서 승상 소하, 책사 장량, 대장군 한신이 개국 3대 공신의 반열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초왕에 봉해져 한 나라의 왕에 이르게 된다. 종국에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게 되지만 한 시대를 풍미한 걸출한 인물이다.

그가 남긴 과하지욕의 고사성어에 숨어있는 또 다른 이야기를 기억할 줄 알아야 한다.

한신은 훗날 한나라의 명장이 되어 자신에게 굴욕을 준 고장을 다시 찾아 건달을 수소문해 만났는데 벌이 아닌 후한 상을 내렸다. 그 때 일을 통하여 ‘큰 뜻을 위해서는 어떤 치욕도 참고 견뎌야 한다는 법을 배웠다’는 감사의 뜻이었다.

당장을 면피하려는 사람이 아니라 먼 훗날을 도모할 줄 아는 그런 인재가 필요한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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