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깨 하실라요?
우덜사는 세상 구갱 쪼깨 하실라요?
  • 최현웅 기자
  • 승인 2018.06.27 09:3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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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에서도 손꼽히는 부자동네였다”
대규모 양잠, 뽕나무밭과 종방이 있던 마을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마을, 거센 도시화
황룡면 월평5리 일산마을 박상호 이장
황룡면 월평5리(일산마을) 박상호 이장
황룡면 월평5리(일산마을) 박상호 이장

“지난 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 동네 참 살기 좋은 동네였습니다. 당시에 양잠하는 곳이 전국에 몇 군데 안됐는데 장성에서는 우리 마을이 유일했어요. 마을에 값진 수입원이 있어 마을 주민들 주머니도 두둑했지만 경제적 풍요 못지않게 청정지역에만 들어선다는 양잠 터의 특성상 공기도 좋고 인심도 좋아 장성에서도 손꼽히는 부자동네였습니다.”

황룡면 월평5리(일산마을) 박상호(61) 이장은 장성관내에서도 비교적 부촌이었던 고향의 모습도 예전의 모습은 아니라며 예전에 살던 이웃이 가끔 이 마을에 들를 때면 자신의 집터도 찾지 못할 만큼 마을의 모습이 많이도 변했다고 회고한다.

일제 강점기. 제국주의 일본은 조선을 합병하고 기름진 호남평야에서 생산된 질 좋은 쌀을 전군가도를 통해 대량을 자국으로 반출한다. 이 때 전면에서 조선의 쌀을 수탈하는데 앞장선 것이 동양척식회사다. 동척은 인도를 침탈한 대영제국의 동인도 회사를 본뜬 식민지 수탈기관으로 조선의 값싼 노동력을 통해 반도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조선 쌀을 앗아갈 수 있었다.

일제는 이에 그치지 않고 조선의 식량 뿐 아니라 조선의 면화와 풍부한 노동력을 착취키 위해 설립한 것이 한국 면방산업의 효시가 된 조선방직이다. 식민지 조선에서 값싼 노동력을 이용해 자국으로 가져가는 착취산업의 구조였지만 바로 이 산업체가 또한 조선 면방산업의 근간을 이뤘다는 사실은 역설적이게도 식민사학자들과 민족사학자들간의 끊임없는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바로 그 방직업체 중 하나인 종연방직이 있던 곳이 바로 이곳. 일산마을이었다.

그 많던 뽕나무, 한 그루도 안남아

그래서 그런지 당시 마을엔 온통 뽕나무밭이 많았었는데 90년대 이후 공장이 들어서고 큰길이 나면서부터 마을엔 그 많던 뽕나무는 한 그루도 남아있지 않고 이젠 옛 시절 종방(종연방직)과 관련한 흔적은 마을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다.

박상호 이장에 따르면 일산마을은 옛 시절에도 그렇지만 지금도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사통팔달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터라 인구이동이 잦고 항상 북적거려 웬만한 도시 못지않은 지역이라고. 그래서 그런지 변화의 속도에 민감한 옛 주민들과 노년세대들은 반갑지만은 않을 것이라고 귀띔해준다.

학교를 마치자마자 객지생활을 하며 떠돌다 항상 가슴속에 품었던 고향이 그리워 25년여 전 연로한 부모님이 걱정돼 귀향을 결심하고 돌아온 박 이장은 정착하자마자 하우스재배를 통해 상추를 재배했다고 한다. 박 이장은 당시에만 해도 장성상추는 전국에서도 알아주는 이름난 채소였다고. 송정리나 양동시장에서 상인들이 찾아와 서로 경쟁하듯 사갔었노라며 지금은 농산물 가격의 값도 많이 떨어진데다 가꾸고 재배할 인건비조차 가파르게 올라 수지타산이 안 맞는다고 탄식한다.

이를 반영이나 하듯 지금은 마을에서도 농사를 짓고 사는 주민들은 전체 100여 가구 주민 중 채 4가구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일산마을회관 전경
일산마을회관 전경

치매 부모님 완쾌 바라지만...

날이 갈수록 고령화가 고착화 되어가고 있는 현실에서 일산마을 역시 노년층 주민들이 늘어가고 있다. 아흔을 바라보는 연세에 치매에 걸려 요양병원에서 연명하고 계시다는 박 이장의 어머님은 건강하게 잘 사시다 갑자기 뇌졸중이 와서 사지가 마비되는 증상을 겪더니 이내 치매 증세까지 함께 왔다고 한다. 또 병환의 어머님을 간호하던 아버님조차 병간호하다 함께 치매를 앓게 됐다고. 박 이장이 가끔씩 병원을 찾아 병간호를 하고 있지만 뚜렷한 대책이 없어 더욱 안타깝다고 한다.

딸만 둘이라는 박 이장 역시 그 시절 한창이던 산아제한운동에 동참(?) 했노라고 말한다. “당시엔 자식들 많이 낳으면 주위에서 욕먹었었어”라며 회상한다.

딸이지만 열 아들이 절대 부럽지 않다는 박 이장은 번듯하게 잘 자라준 두 딸들이 객지에서 바쁘게 살면서도 두 서너 달 간격으로 찾아와 부모들의 안부를 챙겨 주는 등 효녀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며 흐뭇해한다.

일산마을 이장 3년째라는 박 이장은 무엇보다 마을주민간 화합을 이끄는 역할이 이장으로선 가장 큰 일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이를 위해 박 이장은 이장을 맡을 때부터 마을 운영위원회를 조직하고 각자의 역할분담을 나누고 자율적으로 또 책임감을 부여했다고 한다. 특히나 재정과 관련해서는 총무의 역할을 명확히 부여해 행정적 지원과 집행은 이장이 하지만 재정 관리는 총무가 도맡아 처리하고 진행하며 책임을 부여했다고 한다.

박 이장은 “일부 어떤 마을은 이장이 노인회며 운영위며 총무가 할 일까지 참견하고 끼어드는 사례를 봤는데 그럴 경우 이장 본인도 피곤할뿐더러 투명치 못한 업무처리로 주민들의 원성을 살 수 있어 업무에 대한 명확한 구분이 필요하다.”며 공정한 일처리를 강조하기도 했다.

대단위 누에단지 일산동, 공장 들어서며 새 마을 조성

일산동은 일제 때 종방이 있었던 곳이며, 1945년 8.15합장 후 마을이 성촌되기 시작했다. 월평이 200번지 일대가 원래는 아카시아 밭이었는데 일본인 오카모토가 일본정부의 보조를 받아 뽕나무밭을 조성하고, 잠실을 지어 대단위로 누에를 쳤다.

해방 후 잠실에 방 한 칸씩 들여 살게 됐는데, 밀양박씨 지균이 아치실에서 이거해와 교동에서 살다가 오카모토 집 원채에 살았으며, 이 후 여러 사람이 들어와 살게 됐다. 그러다 1978년 고려시멘트에서 광산개발차 와룡리 건동마을을 매입하자 새로운 부지가 필요하게 되어 취락구조 개선사업 시책으로 이곳에 새로운 마을을 조성하게 되었다. 이 때 생긴 전남 잠종장 상전 3303평과 개인토지 3000평을 매입해 택지를 조성했다. 이 때 건동마을 주민 등 24호가 새 마을에 정착했고 마을이 커지자 1980년 월산동에서 분리돼 일산동이라 칭하고 기존마을을 1반, 2반 등으로 나누었다.

풍수지리를 보는 학자들에 따르면 일산마을의 형상이 들판가운데 마을이 있어 배를 닮은 형국이라고 하며 주변에 배의 돛대를 뜻하는 나무를 심어야 번성한다고 한다.

마을 뒤 찻길에서 바라본 미을전경
마을 뒤 찻길에서 바라본 미을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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