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 칼럼] 일장춘몽
[편집국 칼럼] 일장춘몽
  • 백형모 기자
  • 승인 2023.11.06 11:4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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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당나라 때 노생(盧生)이라는 가난한 서생이 있었다. 비록 시골에서 살았지만 세 가지 소원이 있었다. 큰 부자가 되는 것, 출세하여 명성을 얻는 것, 예쁜 아내를 맞이하는 것이었다.

노생이 어느 날 한단(邯鄲)이라는 지역을 지나다 주막에서 신선도를 닦고 있는 도사 여옹(呂翁)이라는 사람을 만났다. 자리에서 어울려 이야기를 나누다 갑자기 노생이 신세타령을 한다.

“사내대장부로 태어났으면 마땅히 공명을 세우고 진수성찬에 음악을 즐기며 가문을 번창 하게 해야 하는데 출세 한번 못해 보고, 이렇게 농사일에만 골몰하는 신세가 가엽기만 하구나” 그러면서 여옹에게 자신의 소원이 이뤄질 수 있도록 애원했다. 묵묵히 듣고 있는 여옹은 목침을 꺼내주며 잠시 쉬도록 했다.

“이보게 이 목침을 베고 잠깐 눈을 붙이게나. 그 동안 주모에게 부탁하여 밥을 짓도록 하겠네”

노생은 밥 때를 기다리다 피곤함을 못 이겨 목침을 베고 눈을 붙였다.

그런데 도사를 만난 이후 노생의 인생길이 술술 풀리게 됐다. 노생이 과거에 응시하자마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황제의 치하를 받아 큰 벼슬에 올랐고, 권력을 갖게 되자 재산도 절로 불어났다. 부와 명성을 거머쥔 노생은 아름답고 현명한 아내를 얻어 총명하고 귀여운 자식들과 함께 영화로운 삶을 마음껏 누렸다. 청렴결백하고 무게 있는 사람으로 소문나 뭇 사람들이 우러러 존경했다. 그런데 이를 시기하던 대신들이 그의 토목공사를 트집 잡아 중상모략해 역적으로 몰려 큰 화를 입게 되었다.

억울하고 분한 노생은 “내 고향 산동에서 농사나 지으면서 살았으면 이런 억울한 누명은 쓰지 않았을 텐데, 무엇 때문에 벼슬길에 나갔던가. 그 옛날 누더기를 걸치고 한단의 거리를 거닐던 때가 그립구나!”라고 한탄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고자 했지만 아내와 자식의 간곡한 만류로 차마 자결하지 못했다. 다행히 사형은 면했으나 멀리 유배를 떠나 험난한 가시밭길을 걷게 됐다. 황제가 바뀌자 모함이 밝혀져 복권됐고, 신임을 얻어 재상의 지위까지 올랐다. 노생이 인생 말년까지 그렇게 부귀영화를 누리고 80세가 되어 관직을 하직하려고 황제에게 마지막 상소를 올린다.

“신은 산동성 서생으로 태어나 우연히 태평성대를 만나 관료의 대열에 들어서고 폐하의 과분한 은총으로 재상의 자리까지 오르는 영화를 입었습니다. 이제 살과 뼈가 모두 노쇠한지라 세상과 하직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태평성대와 작별하려 합니다.”

그러자 황제가 화답한다. “경이 나를 도와 치세가 평탄했고 백성들의 웃음이 끊이질 않았소. 특별히 명의와 탕약을 내리겠으니 하루 빨리 기력을 되찾기 바라오.”

그런데 황제의 이 말이 끝나자마자 노생은 죽고 말았다. 가족들의 곡소리가 하늘을 찌르고 온 고을에 이 소식이 퍼져나갈 무렵 어디선가 희미하게 노생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보게, 밥이 다 익었으니 이제 일어나 밥 먹게나.”

노생이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떠보니 여옹이 밥상을 들고 들어오고 있었다. 몸은 잠들기 전 그대로 누각에 누워있고 주모가 밥 짓기 전에 찧던 조는 절반 정도 빻아졌다. 밥솥에 때던 군불은 사그라지고, 밥솥의 김은 모락모락 일고 있었다. 그 밖에 눈에 닿는 모든 것이 잠들기 전과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벌떡 일어난 노생이 탄식한다. “기기몽매야(豈其夢寐也) : 그것이 정녕 꿈이었더란 말인가?”

여옹이 웃으며 말을 받는다. “인생지적 역여시의(人生之適 亦如是矣): 그렇다, 인생의 흔적은 바로 한 조각 꿈이다”

노생은 한참 동안 멍하니 넋을 잃고 있다가 정신을 차린 뒤 예의를 갖춘다.

“무릇 총애의 길과 오욕의 길, 곤궁과 영달의 운명, 성공과 실패, 죽는 것과 사는 것의 이치를 깨달았습니다. 소생의 덧없는 욕심을 막아주신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그렇다. 모두가 한바탕 꿈이었다. 80년 동안의 부귀영화가 잠깐 밥 짓는 사이의 일이었다.​

이곳에서 파생된 고사성어가 노생지몽(盧生之夢)이란 말이다. 인생과 영화의 덧없음을 이른다. ‘노생이 한단이란 곳에서 여옹의 베개를 빌려 자다 꿈을 꾸다’라는 뜻의 한단지몽(邯鄲之夢)이란 말도 여기에서 나왔다. 인생이 한바탕 봄날의 꿈에 불과하다는 뜻의 일장춘몽(一場春夢)도 같은 의미다.

그저 사라져 버릴 한순간 꿈을 쫓는 것이 인생이다. 영욕과 부귀, 산해진미와 미인을 취하고 즐기는 순간은 밥솥의 김이 서리는 시간과 다름없다. 설령 움켜쥐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놓아야 한다. 악착같이 집착한들 결국 내 것이 아니다. 마음을 비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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