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행인 칼럼] 영화 ‘서울의 봄’의 독재자의 최후
[발행인 칼럼] 영화 ‘서울의 봄’의 독재자의 최후
  • 장성투데이
  • 승인 2023.12.11 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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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천 발행인

 영화 ‘서울의 봄’이 누적 관객 수 500만 명을 돌파했다. 작품성과 흥행성으로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 이 영화는 1979년 12월 12일 수도 서울에서 일어난 신군부 세력의 반란과 그것을 막기 위한 진압군간의 일촉즉발의 9시간을 그린 영화다.

1979년 장기 집권 중이던 박정희 대통령이 측근 김재규에 의해 피살된다. 전두환은 박정희 피살사건를 맡은 합동수사본부 책임자였고 정보력과 권력을 쥔 보안사의 사령관이었다.

전두환은 1979년 12월 12일 밤 7시 보안사 수사관 8명과 합동수사본부 헌병1개 중대 60여명을 동원,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을 납치해 보안사 서빙고 분실로 연행했다. 혐의는 ‘박정희 암살공모’로 박정희 피살당시 정승화가 피살 장소인 궁정동 안가의 본관 식당에 있었다는 이유였다. 전두환은 대통령 최규하로부터 정승화 체포에 대한 사후 재가를 받아 내었으며, 이후 대대적인 군 인사를 단행해 군을 장악했다.

전두환은 1980년 4월에 중앙정보부장 서리에 임명되어 보안사령부와 중앙정보부를 장악할 수 있게 되었다. 그해 5월17일 전두환은 전군 지휘관 회의를 열고 계엄을 확대했으며,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등 정계를 대표하는 3김을 체포하거나 가택연금하고 그 외 정치세력을 모두 체포했다.

이것이 12.12 군사반란 쿠데타다.

계엄이 확대되고 김대중 등의 정치인들이 체포되자 광주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대대적인 시위를 벌이며 저항했다. 광주 시민봉기는 5월18일에 시작되어 27일까지 지속되었고 전두환 세력은 광주에 공수부대를 투입하고 시민들을 무참히 학살했다. 신군부는 5월22일 김대중이 폭동을 조종하고 있다며 그에게 내란 협의를 씌웠다. 계엄사는 철저한 보도 통제 속에 배후에 북한간첩과 불순분자들이 있다고 주장하고,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내몰았다. 결국 비상계엄에 저항한 광주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은 군인은 투입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면서 힘없이 무너졌다.

여기서 ‘서울의 봄’이라는 표현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봄’에 비유한 것이다.

프라하의 봄 사건은 1968년 체코슬로바키아 사회주의공화국 당 제1서기 알렉산드르 둡체크에 의해 시작된 민주화 운동이다. 1956년쯤 체코는 스탈린주의자 노보트 정권의 보수주의가 계속되고 있었고 60년대 이르러 국민들은 공산주의에 등을 돌리기 시작하면서 둡체크라는 인물이 나타나 급진적 자유주의 개혁을 밀어 붙인다.

그런데 자유를 갈망하는 체코국민들을 가만히 두었다간 동유럽 다른 국가들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 질까봐 소련은 체코를 침공하고 둡체크를 강제 해임시키고 개혁파 주도자들을 숙청함으로 체코의 자유화 운동을 철저히 저지 시켰다.

바츨라프 광장에 많은 시민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전차로 밀고 들러왔다.

소련은 1968년 냉전이 도래한 시대에 자유화, 민주화를 갈망하는 체코인들을 무참히 짓밟고

억압하고 공산주의 사상을 강조하는 나치에 이은 또 다른 압제자가 되었다.

그렇게 프라하의 불씨는 거대한 권력 앞에 힘없이 꺼져버렸다.

‘서울의 봄’ 영화가 개봉하면서 12.12 사태가 다시금 관심을 받고 있다.

비록 당시 핵심인물로 많은 여론의 지탄을 받고 있던 전두환은 사망했고, 그것도 천수까지

누리면서 역사의 한편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12.12사태는 격변의 한국 근대사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12.12사태를 통해 권력을 잡은 전두환은 이후 노태우에게 정권을 물려주며 13년 동안 대한민국을 주무르는 권력을 누리게 된다.

‘전 재산 29만원’밖에 없다는 이유로 추징금을 납부하지도 않고 끝까지 버틴 독재자의 근성이 나이가 먹어도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전두환 일가의 숨겨진 재산이 1조 원대 부동산 사업을 몰래해 왔고 이를 밝혀내 환수해야 할 검찰은 해당사실을 전혀 파악하지 못했다.

내란목적 살인, 뇌물수수 협의로 무기징역과 2,205억 원의 추징금을 선고 받았지만,그는 922억의 미납 추징금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더욱더 가관인 것은 죽어서도 애국자인양 하는 독재자 행동이다.

그의 생전 회고록에 ‘북녘 땅이 내려다보이는 전방 고지에 백골로라도 남아 통일의 날을 맞고 싶다’라고 했다.

수많은 국민들을 학살하고 자유를 짓밟은 그에게 이 조국 어디에도 묻힐 자리는 없다.

죽을 때까지 반성은커녕 독단 독선의 극치를 보여준 독재자가 묻힐 자리는 없다.

수많은 영령들의 무덤 앞에 한 톨 한 톨 씩 죽어서도 죄를 묻는 의미에서 그들의 무덤에 갈기갈기 뿌려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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