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화위가 진실규명한 장성 민간인 희생사
진화위가 진실규명한 장성 민간인 희생사
  • 최현웅 기자
  • 승인 2024.03.25 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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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1951년 1월까지 희생한 26명

장성투데이는 지난해 12월 19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장성지역 주민 26명이 국군과 경찰에 집단 희생된 사건에 대해 진실 규명을 결정한 것과 관련 당시 피해자들의 진술을 발췌해 수회에 걸쳐 연재한다.

이 사건은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장성군 장성읍, 진원면 등 5개 읍·면에 거주하던 주민 26명이 국군과 경찰에게 희생된 사건이다.

진실화해위의 조사 결과 희생자들은 부역 혐의자 또는 빨치산 협조자라는 이유 등으로 국군 제11사단 20연대 군인 및 장성 경찰서와 지서 소속 경찰 등에게 살해된 것으로 드러났다.

희생자 다수는 20~30대의 남성이고,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비무장 민간인이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진실화해위는 국가기관인 군과 경찰이 비무장 민간인을 법적 근거와 적법절차 없이 살해한 행위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기본권인 생명권, 신체의 자유, 재판을 받을 권리를 침해하고 적법절차 원칙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했다.

이에 진실화해위는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유족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 피해 회복을 위한 조치, 추모사업 지원, 가족관계등록부 등 공적기록 정정, 평화인권교육 실시 등을 권고했다.

-편집자 주

 

① 장성읍 성산 꽃뫼 집단 희생사건

현재까지 장성읍 백계리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 김○○(1936년생)은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그때 당시 우리 나이로 15살이었는데, 9·28 수복 후 20연대 군인들이 백계리로 들어왔고, 군인들이 철수한 뒤에는 경찰이 들어와 마을의 치안을 담당하였다. 지서 건물은 장성읍 성산리에 있었는데, 지서 소속 의경들이 백계리 야산 밑에 막사를 짓고 근무하면서 빨치산이 있다는 밀고를 받으면 잡으러 다니는 것을 직접 보았다.

당시 호남지역 빨치산 본부가 순창군 쌍치면에 있었던 것으로 아는데, 장성까지 빨치산들이 내려와 밤이 되면 경찰 막사를 향해 공격했고, 의경들이 이를 방어하려고 다시 총을 쏘는 바람에 번갈아서 공격하는 듯한 소리가 자주 들렸다.

그때 막사에서 근무한 의경들이 빨치산 공격을 방어하는데 조금이라도 지장이 생기면 백계리 주민들에게 ‘아군 편 안 들고 뒷구멍으로 반란군에게 협조한다’라며 강제로 끌고 가서 총살하는 일이 많았다.]

위 진술과 같이, 장성읍이 수복된 이후 주민들에 대한 경찰의 강제 연행, 사살 등이 자행된 것으로 보이며, 마을 주변으로 산이 많은 지역의 주민들이 인공(인민공화국)때 빨치산에게 부역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 주민들을 희생시킨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장성읍에서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진실규명대상자들의 가해 주체는 신청인 및 참고인들이 경찰 또는 군경토벌대라고 진술한 점 등으로 보아 장성 경찰 및 군경 합동토벌대로 추정된다.

1950년 10월부터 1951년 1월까지 장성읍 각지에서 발생한 희생 사건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진실규명대상자 김○빈 (신청인 김○○)

진실규명대상자 김○빈(1923년생, 남, 노무직)은 1950년 10월 24일(음력 9월 14일)경 장성읍 백계리 집에서 경찰에게 끌려간 뒤 행방불명되었다.

신청인 김○○(1945년생, 아들)의 진술에 따르면 김○빈은 장성읍 백계리 백계1구에 거주하였고 광주를 오가며 노무에 종사하였다. 1950년 10월 24일경 광주에서 일하던 김○빈이 빨랫감을 갖다 주고 새 옷을 가져가기 위해 백계리 집으로 와있었는데, 집으로 찾아온 경찰에게 끌려간 뒤 행방불명되었다.

이날 동네 사람들이 김○빈이 끌려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며, 그때 잡혀간 사람들은 모두 성산리 꽃뫼에서 총살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하여 정확한 사망 장소는 알지 못한다.

참고인 김○○(1938년생, 이웃)의 전문 진술에 따르면 인민군 점령기에 가족이 학살당한 김 순경이 백계리 주민들에게 빨치산을 도와줬다는 누명을 씌워 경찰에 밀고하였다. 김○○의 아버지가 성산지서로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왔는데, 그 후 김○빈도 지서로 끌려간 뒤 꽃뫼에서 총살된 것으로 알고 있다. 김○○는 당시 마을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였다.

인공 때 자기 가족이 학살당한 사람들이 인민군이 물러가고 나서는 경찰이 되어 돌아와 자기 가족이 학살당한 것에 대한 보복을 했던 것 같다. 그래서 지나가던 사람을 불러다가 세워놓고 괴롭히기도 하고, 지서로 잡아가서 고문하고 총살하고 그런 시기였다. 백계리뿐만 아니라 장성읍 다른 마을에서도 경찰들이 민간인들을 꽃뫼로 끌고 가서 총살한 것으로 알고 있고, 당시 죽은 사람이 셀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한다.

참고인 김○○(1947년생, 이웃)은 시아버지 차○○이 사망한 날에 김○빈이 백계리에서 행방불명되었고, 그래서 제삿날이 음력 9월 13일로 동일하다고 진술하였다.

신청인(김○○)이 아버지 김○빈의 사망 장소라고 추정한 꽃뫼의 위치는 위성지도상 지금의 야은리와 성산리 주변이다.

제적등본에는 김○빈이 1966년 8월 1일 사망(1966년 8월 4일 동거자 김○○ 신고)하였다고 기재되어 있고, 족보에는 경인년(1950년) 9월 14일 졸로 기재돼 있다.

진술 및 족보를 근거로 김○빈의 실종일은 1950년 10월 24일(음력 9월 14일)로 연행이유는 백계리 주민이 빨치산에 협조적이었다는 이유로, 신청인과 참고인 모두 김○빈이 경찰에게 연행된 후 행방불명되었다고 하므로, 김○빈 연행의 주체는 장성경찰서 성산지서 경찰로 추정된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신청인이 어머니에게 들은 내용을 구체적으로 진술하였고 참고인 김○○의 진술이 이를 뒷받침하는 점, (2)차○○의 며느리 김○○이 김○빈의 제삿날이 차○○과 같다는 내용을 진술 한 점, (3) 족보상 김○빈의 사망일이 1950년 9월 14일로 기재되어 있고 제사를 음력 9월 13일에 지내고 있는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김○빈은 백계리 주민들이 빨치산을 도와줬다는 이유로 1950년 10월 24일(음력 9월 14일)경 장성읍 백계리 경찰에게 연행된 뒤 행방불명되었다고 판단된다.

 

2) 진실규명대상자 김○곤 (신청인 김○○)

진실규명대상자 김○곤(1919년생, 농업)은 1950년 11월 2일(음력 9월 23일)경 성산리 꽃뫼에서 성산지서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신청인 김○○(1943년생 김○곤의 아들)에 따르면 김○곤은 장성읍 백계리 백계1구에 거주하던 중, 1950년 11월 1일(음력 9월 22일) 마을주민 3명과 같이 성산지서 경찰에게 연행되었고, 다음날인 11월 2일(음력 9월 23일) 새벽에 꽃뫼에서 총살되었다. 김○곤이 연행된 다음 날 꽃뫼에서 집단 총살이 있었다는 소문을 듣고 김○곤의 부인 정○○과 동생 김○○이 꽃뫼로 가서 김○곤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참고인 김○○(1936년생, 백계1구 주민)은 “김○곤이 당시 마을 구장(현재의 이장)이었는데, 1950년 가을쯤 지서 경찰에게 끌려간 뒤 장성읍 성산리 꽃뫼에서 총살되었다. 당시 경찰들이 ‘백계리에 빨치산이 숨어들었다는 밀고가 있는데 당신이 빨치산 도와준 것 아니냐’며 구장이었던 김○곤을 잡아간 것으로 알고있다”라고 진술하였다. 백계1구 주민인 참고인 김○○(1938년생, 이웃) 또한 ‘백계리 주민들이 성산지서 경찰에게 끌려가 총살되었을 당시 김○○의 아버지도 총살된 것으로 안다’ 라고 진술하였다.

김○곤의 희생일은 제삿날과 제적등본상 기록으로 확인된다. 신청인이 음력 9월 22일 제사를 지낸다고 진술하였고, 제적등본에 김○곤이 1950년 9월 22일 사망(1953년 10월 19일 동거자 김○○ 신고)한 것으로 기재되어 있어 희생일(제삿날)과 일치한다. 따라서 김○곤의 희생일은 1850년 11월 2일(음력 9월 23일)로 추정된다.

김○곤의 희생 이유는 참고인 김○○의 진술을 근거로 빨치산 협조 혐의로 추정된다. 가해 주체는 신청인과 참고인 모두 성산지소 경찰이라고 진술하였다. 진실규명대상자가 경찰에게 연행된 후 총살되었기에 이 사건의 가해 주체는 장성경찰서 성산지서 경찰이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신청인이 어머니 정○○과 작은아버지 김○○에게 전해 들은 진실규명대상자의 희생 경위를 상세히 진술하였고, 참고인이 희생 경위를 일관되게 진술하고 있는 점, (2)제적등본상 사망 일자가 희생일(제삿날)과 일치하는 점, (3)희생 장소에서 시신을 수습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김○곤은 1950년 11월 2일 (음력 9월 23일)경 성산리 꽃뫼에서 빨치산 협조혐의를 이유로 성산지서 경찰에게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3) 진실규명대상자 이○일(신청인 이○○)

진실규명대상자 이○일(남 1927년생, 농업)은 1950년 11월 2일 (음력 9월 23일)성산리 꽃뫼에서 성산지서 경찰에게 희생되었다.

신청인 이○○(1949년생, 아들)에 따르면, 이○일은 장성읍 백계리 백계1구에 거주하였고, 농사를 지으며 마을 일도 보고 우체국 일도 돕던 사람이었다.

1950년 11월 1일 이○일의 아버지 이○○가 논에서 볏짚을 뒤집던 중 성산지서 경찰에게 끌려갔다.

아버지의 연행 소식을 들은 이○일이 성산지서에 찾아갔는데, 경찰이 이○○를 걸음도 제대로 못 걸을 정도로 구타한 상태였다. 이○일이 지서에 도착하자 경찰이 이○○는 풀어주고 대신 이○일을 가두었다. 그 이튿날(11월 2일) 이○일은 지서에 잡혀있던 사람들과 같이 성산리 꽃뫼로 끌려가서 총살당하였다.

신청인 이○○은 “할아버지가 아버지 시신을 수습하였을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해 주신 적이 있는데, 꽃뫼에서 죽은 청년들의 시신이 다 끈으로 줄줄이 엮여 있어서 할아버지가 그 끈들을 낫으로 끊어내서 시신을 한 구씩 눕히며 아버지 시신을 찾았다고 들었고, 아버지가 입고 나간 옷으로 시신을 확인했는데 오른쪽 귀 위에 총알 자국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라고 진술하였다.

참고인 김○○(1936년생, 백계1구의 주민)의 전문 진술에 따르면, “당시 이○일의 아버지가 지서에 잡혀있다는 소식을 듣고 이희일이 지서에 갔다가 그 아버지는 풀려나고 자기가 대신 잡혀 들어갔다가 꽃뫼에서 총살당했다고 들었다. 그 후로 이○일의 아버지가 다리가 굽어서 뒤뚱뒤뚱 걸어 다녔던 것이 기억난다”라고 진술하였다. 백계1구 주민인 참고인 김○○(1938년생, 이웃)도 ‘경찰들이 주민들을 꽃뫼로 끌고 가 총살하였을 당시 이○○의 아버지도 사망한 것으로 안다’라고 진술하였다.

이○일의 희생일은 제적등본과 제삿날로 추정된다. 제적등본에는 이○일이 ‘1950년 9월 2일 사망(1954년 3월 12일 호주 이○○ 신고)’하였다고 기재되어 있으나 9월 22일 또는 9월 23일의 오기로 판단되고, 신청인이 음력 9월 22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고 진술하므로, 이○일의 희생일은 1950년 11월 2일(음력 9월 23일)로 추정된다.이○일의 희생 이유는 성산지서에 연행된 아버지 이○○ 대신에 사살된 것으로 추정되나, 이○○가 성산지서로 연행된 이유에 대해서는 확인할 수 없었다.

가해 주체는 신청인과 참고인 모두 성산지서 경찰이라고 진술하였다. 진실규명대상자가 아버지를 찾기 위해 성산지서에 갔다가 총살되었기에 이 사건의 가해 주체는 장성경찰서 성산지서 경찰이다.

이상의 내용을 검토한 결과, (1)신청인이 할아버지 이○○에게 전해 들은 진실규명대상자의 희생 경위와 시신 수습 경위를 구체적으로 진술하였고, 참고인이 희생 경위를 상세히 진술하고 있는 점, (2)제적등본상 사망일자가 희생일과 유사한 점, (3)희생 장소에서 시신을 수습한 점 등을 종합하여 볼 때 진실규명대상자 이○일은 1950년 11월 2일(음력 9월 23일)경 성산리 꽃뫼에서 성산지서 경찰에게 희생되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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